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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예의가 없는 권력 /탁석산

진상규명도 중요하지만 국민앞에 사과부터해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02-02 21:25:22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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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진상규명. 이것이 이명박 정부의 원칙인가 보다. 며칠 전 대통령은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용산 참사에 대해 이 원칙을 다시 한 번 천명했다. 즉 질서를 잡으려면 원칙에 충실해야 하고, 이번 일도 잘잘못을 따져 책임은 결과에 따라 져야 하는 것이며, 책임을 묻는 과정에 앞뒤가 안 맞으면 어떤 공직자가 일하겠느냐고 발언했다. 역시 선 진상규명, 후 책임자처벌이라는 원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왜 이 원칙인가. 그것은 원칙을 지킴으로써 법과 질서를 세워 공직자들이 소신껏 일하는 풍토를 조성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믿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 책임을 물어 재발을 방지하려면 진상규명이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원칙 적용이 자의적이다. 즉 어떤 사건에는 적용되지만 또 어떤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 전 국세청장 뇌물 수수 논란을 보자. 국세청장의 뇌물 수수 의혹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국세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가 뇌물 수수에 연루된다는 것은 국가 기강을 흔들 만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우 엄중히 다스려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사건은 진상규명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며칠 만에 종결되었다. 한상률 전 청장이 전임 국세청장에게 3000만 원 상당의 그림을 뇌물로 제공했다고 전임 총장의 부인이 주장했는데, 두 명의 총장은 모두 이런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렇다면 진상은 무엇인가. 왜 전임 총장의 부인이 그런 사실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그 그림이 시장에 나와 있는가. 이 정부의 원칙대로라면 먼저 진상규명을 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논란이 나자 3일 만에 한 전 총장은 사표를 냈다. 김석기 경찰총장 내정자는 사표를 내라는 안팎의 압력에도 꿋꿋이 사의 표명을 하지 않고 있는데 왜 전 국세청장은 진상규명도 없이 황급히 물러났는가. 권력 내부의 문제인가. 원칙은 어디로 갔는가.

둘째, 국민에 대한 예의가 없다. 진상규명을 강조하는 가운데 국민에 대한 예의가 실종되었다. 학생 두 명이 심하게 치고받았다고 해보자. 한 쪽이 심하게 다쳐 입원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이 때린 학생의 부모가 와서 먼저 사과부터 하는 게 예의다. 우선은 사람이 심하게 다쳤으니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사과를 하고 그 다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알아보는 게 사람 사는 순서다. 사과는 전혀 하지 않고 이렇게 된 것은 댁의 자식이 먼저 시비를 걸고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므로 먼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고 사과할 일이 있으면 사과하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자식 가진 부모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 진상규명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못한 데에 대해 사과부터 해야 한다. 사과는 대통령이 직접 하지 않더라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의 주무부서인 행정안전부 장관을 경질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 장관이란 자리는 원래 정치와 행정이 공존하는 자리다. 행정적 책임뿐만 아니라 정치적 책임도 함께 지는 자리이기에 국회청문회를 거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이번 참사를 보면 장관은 등장하지 않는다. 서울지방경찰청장 수준에서 진퇴가 논의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예의가 실종되었다는 증거다. 장관이 나와 사과하고 사퇴한 후에 새로운 장관의 지휘 아래 진상규명을 한다면 한결 모양새가 좋을 뿐 아니라 진상규명도 더 신뢰를 얻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진상규명은 오히려 의혹만 키울 것이다. 도대체 장관은 어디로 간 것인가.

전철련 개입과 화염병을 이유로 이번 참사를 공권력의 정당한 집행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철거민이든 전철련 사람이든 다 국민이다. 국민이 설사 불법을 저지르고 폭력을 행사한다고 해도 독점적인 폭력을 갖고 있는 공권력은 그 행사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국민은 진압의 대상이 아니다. 학생이 잘못 했다고 해서 교사가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국민을 섬기겠다고 한 것이 일 년 전쯤의 구호였던 것 같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법과 질서도 좋고 선 진상규명도 좋지만 그 모든 것이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섬기지는 않더라도 예의는 지키길 바란다.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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