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로 출장을 갔다. 아침에 호텔 방으로 배달된 '싱가포르 타임'에 '부를 과시하는 유행은 이제 끝났다'라는 제하의 기사가 있었다. 신종 페라리가 있다 하더라도 낡은 BMW를 타고 거리에 나가야 되지 않겠느냐는 게 기사의 요지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해지고 있는 요즈음 아르마니 양복이 있다 하더라도 혹은 샤넬 핸드백이 있다 하더라도 뽐내며 입고 들고 거리를 활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부를 과시 하고 부를 좇아가는 것이 지난 40년간의 풍조이자 유행이었다면 지금부터는 가난이 유행이라는 말이 된다. 바야흐로 세계는 '가난 모드'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 파티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수다를 떨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물론 음식이 여러 가지 잘 차려져 있던 탓이기도 하지만) 다소는 자조적으로 "많이 먹어. 먹는 게 남는 거잖아"라고 말했다. 비만과 성인병이 현대인의 문제라며 많이 먹는다는 개념은 저개발 국가적이거나 가난한 계층에서 쓴 말이었는데 지금의 글로벌 경제 위기는 다시 사람들을 먹고 자는 본질적인 것에 대한 천착으로 퇴행시켜 버렸나 보다.
1930년대에 작가 존 스타인벡으로 하여금 '분노의 포도'를 쓰게 했던 경제 대공황이 지금 우리의 목전에 있다면 지나친 기우인가. 혹자는 그때보다도 더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혹자는 그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한다.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빈부의 격차와 자연재해, 식량난, 식수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은 모든 미래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다. 일부러 가난을 유행으로 삼을 미친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반문해 보지만 얼핏 생각해 보더라도 가난을 일부러 선택하고 또한 인류에 가난 모드를 유행시킨 사람들이 있긴 있었다. 멀리 석가모니가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다. 테레사 수녀, 성 프란치스코, 마하트마 간디- 그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으며 풍요와 부의 병에서 빠져 나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가난을 유행시켰다.
한 번 자고 나면 날마다 자산의 디플레를 경험하고 있는 지금이 그렇다. 이왕에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가난이 유행이라고 치자. 일부러 가난하게 살고 가난을 선택했던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며 이 참에 그동안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왔던 부와 성공의 허망함을 다시 한번 깨우치면서 이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오히려 마음 편한 일일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조금씩은 혹은 상당히 가난해지지 않을 길이 없을 테니까.
일생 동안 안 먹고 안 쓰고 모았던 돈을 펀드에 묻어 두고 곶감 빼먹듯이 맛있게 미래의 노후생활을 즐기려 했건만 웬걸, 구경도 못해보고 없어졌다. 이 지구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아무데로도 가지 않을 것 같았던, 아니 갈 수 없었던 부동산들도 값이 급락해버렸다. 원자재를 수입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환율이 마치 '미친 년 널 뛰는' 것 같으니 아예 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다. 믿고 살 것이 없어져 버렸다. 돈이 효자고 돈이 마누라나 남편보다도 더 중한 시대에 가진 돈이 없어져 버렸으니 사람들은 여기서 저기서 생명을 끊고 있다. 변액보험을 팔았던 은행장도 자살하고 투자자도 자살하고 증권맨들도 자살하고 있다. 사채에 쫓기던 인기스타 안재환과 국민배우 최진실의 자살이 일종의 신호탄이었던가. 요새는 신문 보기도 뉴스 보기도 싫어. 아예 포기했어. 나도 그들처럼 죽고만 싶어. 만져보지도 쳐다본 적도 없는 내 돈이 도대체 어디로 연기처럼 날아가 버렸나. 이젠 무얼 믿고 살아야 하나.
그러나 이럴수록 돈에 대해서 새롭게 정의하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봐야 한다.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서로 보듬고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한다. 가난이 유행인 시대이니 모든 것을 줄이는 게 유행이고 먹는 게 남는 것이니 겸손하고 배 부르게 먹고 깨끗한 식수를 마시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자. 그러고도 남는다면 나누어 주자. 처음에 사람들이 '먹는 게 남는 거야, 많이 먹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삶이 그렇게 단세포가 될 수가 있을까 그리고 요즘처럼 심각한 경제 위기에 서로 말하기에는 좀 가볍고 패배적으로 또 이기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국적 불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람들은 많은 고난 속에서 '먹는 게 남는 거야. 있을 때 많이 먹어'라면서 서로 토닥거리며 어려운 삶을 견디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이 대유행인 지금 먹는 것이 충족되면 마음을 비우라는….
우리들 생명과학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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