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프라임론에서 시작된 금융혼란이 매일 새로운 형태의 공포로 모습을 바꾸면서 우리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다. '저축의 시대에서 투자의 시대'가 되었다는 믿음에 쌈짓돈을 주식시장에 넣은 개인들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지는 벌써 오래되었고, 주식시장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사람들까지도 10년 전의 외환위기를 기억하며 숨죽이고 있다. 14일 세계 주식시장이 폭등했지만 앞으로의 전망은 온통 불투명하다.
그동안 세계 경제는 미국시장에 상품을 수출해 달러화를 벌어들인 나라가 그 돈으로 미국 채권을 사주며 달러화를 미국에 되돌려주는 구조를 유지해왔다. 덕분에 미국인들은 저리로 빚을 얻어 집도 사고, 외국의 상품을 분에 넘치게 소비하는 대신 수출국들은 미국이라는 큰 시장을 활용해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끝없이 오를 것만 같았던 미국의 집값이 폭락하면서 신용도가 낮은 개인을 대상으로 돈을 꾸어 주었던 은행, 이를 근거로 파생상품을 설계했던 증권회사가 줄줄이 도산하며 금융위기가 시작됐다. 이번 금융시장 위기는 글로벌화가 진행된 후 최초로 발생한 21세기형 위기로 그 충격이 너무나 심각하다.
선진7개국(G7)은 지난 주말 회동해 통화공급 확대를 결의하고 호주는 은행예금에 대해 무제한 보장하겠다고 나섰다. 영국은 은행의 부분적인 국유화라는 카드까지 꺼냈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표현대로 유동성 경색을 '헬리콥터를 타고 돈을 뿌려서'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나라 금융기관은 미국과 달리 모기지 대출이나 파생상품에 투자해 큰 손해를 본 것도 아닌데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을 받아 2000억 달러 이상의 외환보유고에도 불구하고 제2의 외환위기를 걱정할 정도이다. 국내 증권시장에 이렇다 할만한 매수세력이 없는 가운데 외국인 주식매도→주가하락→ 원화가치 하락→외국인 주식매도라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주 증권유관기관들이 4000억 원 공동펀드를 마련한다는 발표를 했지만 시가총액 800조 원이 넘는 우리 증권시장에 그 정도의 규모는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면 어떤 방안이 있을까.
블랙먼데이 때 일본 정부가 취한 사례가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1987년 블랙먼데이로 전 세계의 주식시장이 폭락할 때에도 일본 주식시장은 상하한가제도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것도 잠깐, 연말이 되자 일본 주식시장은 폭락을 맞았고 일본발 세계 금융시장의 폭락이 우려될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 주식시장 폭락 배경에는 1988년 3월 결산 때부터 도입하기로 되어 있던 특정금전신탁계정의 저가법(시가와 원가 중 낮은 것으로 평가하는 방법)이 있었다. 저가법이 적용되기 전에 평가이익이 나는 종목을 서로 먼저 매도하겠다는 투자자들 때문에 주가는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일본 총리가 된 당시 미야자와 대장상은 특정금전신탁과 펀드트러스트에 대한 저가법 적용을 1년 미룬다고 발표했다. 발표와 동시에 주가는 1215포인트가 올랐다.
2008년 6월말 현재 우리나라의 은행 보험회사 증권회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은 각각 1800조, 440조, 170조 원에 이르지만 이들 기관투자자의 주식투자비중은 매우 낮다. 외환위기 이후 도입되거나 강화된 건전성 지표인 BIS, 지급여력비율, 영업용순자본비율 때문에 기관투자자들이 주식투자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방식의 규제가 실시되고 있는 다른 나라에 비해 이들 기관의 주식투자비중이 낮은 것은 우리나라 경영진의 지나친 안전성 선호 때문이지만 그 덕분에 지금과 같은 비상사태에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우리도 1987년 일본의 경우를 참고해 향후 1년간 은행, 보험회사, 증권회사에게 이러한 비율 적용을 한시적으로 유예해준다면 기관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증권시장의 안전판 역할을 하면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본다. 무릇 좋은 경제정책이란 중장기적으로 경제체질을 개선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위기극복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지금과 같은 비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긴급하고도 예외적인 행동이 요구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남의 나라에서 발생한 '시장의 실패'를 우리나라 '정부의 성공'으로 막아내야 하는 시기다.
그린손해보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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