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대한민국과 우리에게 수많은 일이 벌어진 격동의 해였다. 민주항쟁을 거쳐 직선제로 당선된 첫 대통령이 취임했으며 9월에는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사람들은 앞으로 열릴 90년대가 가져올 희망을 꿈꾸기도 했다. 그해 5월 MBC가 방송한 드라마 ‘인간시장’에는 장총 대신 정의의 칼날을 겨누며 사회 부패와 비리를 해결하는 한 젊은이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인간시장’은 소설가 김홍신의 원작을 드라마화한 것으로, 80년대엔 소설을 각색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다. 박경리의 ‘토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작품이 인기 드라마가 됐다. ‘인간시장’은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가 만든 초창기 드라마로, 이 두 사람은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를 거쳐 ‘태왕사신기’까지 최고 콤비로 활동한다.
연극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한 편으로 대학로 스타로 떠오른 신예 박상원이 주인공 ‘장총찬’ 역을 맡아 범죄·비리 현장을 쓸어버리는 활약상을 보고 여고생이던 나는 열 일 제쳐두고 환호했다. 선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에 사로잡혀 바로 팬이 된 나는 문방구에서 박상원 스티커·사진을 한 보따리 사 필통에 도배했다가 기습적인 가방 검사 때 죄다 압수된 쓰라린 사건도 겪었다. ‘인간시장’이 인기를 끈 것은 80년대로 넘어오며 급증한 범죄와 한국의 암울한 현실을 송지나 작가가 ‘추적 60분’에서 직접 취재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실감 나게 그린 덕분이다. 국내 첫 밀리언셀러인 원작소설의 완성도도 한몫했다. 훗날 K-드라마가 한류 콘텐츠로 각광받게 한 초석을 다졌지만, 제작 환경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8년 전 유명을 달리한 김종학 감독에게도 거듭 애도의 뜻을 표한다. 그가 연출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신의’ 이후 김종학의 또 다른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종 무기 없이, 현란한 특수효과 없이 발차기 하나로 정의를 실천한 장총찬. 그가 보여준 내 십대의 영웅신화는 그렇게 기억 뒤편으로 사라져갔지만, 한 ‘드라마 키드(kid)’를 감동시켜 언젠가 ‘인간시장’처럼 통쾌하고 영향력 있는 드라마를 쓰겠다는 작가의 소망을 품게 만든, 내 인생의 드라마이다.
경성대 글로컬문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