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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요새, 그 절제 뒤 숨겨둔 보석같은 이슬람 건축

최진숙의 유네스코 세계 유적지 이야기 <10> 스페인 알람브라

  • 최진숙 전 영산대 글로벌학부 교수
  •  |   입력 : 2026-09-15 18:54:01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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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알람브라의 아라야네스 중정. 중정 연못 양쪽에 심어진 ‘천국의 꽃’으로 불리는 아라야네스에서 이름을 얻었다고 알려졌으며, 알람브라 나스리 궁전의 기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다.
- 800년간 이슬람 지배 종식시킨
- 1492년 스페인의 그라나다 정복
- 무어인들 퇴장하며 남겨둔 유산
- 스페인의 여러 건축물 어우러져
- 요새·궁·정원·성당 등 복합 유적

1392년 조선의 개국,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학창 시절 시험을 준비하며 이렇게 100년마다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을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1492년 하면 자연스레 스페인의 후원으로 시작된 콜럼버스의 대항해가 떠오른다. 그러나 같은 해, 스페인 역사에서는 또 하나의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 바로 그라나다 정복이다. 이는 이베리아반도에서 800년간 이어져 온 이슬람 지배의 종식을 의미했고, 스페인이 새로운 통합 국가로 나아가는 분수령이었다. 그때 그라나다 왕국의 무어인들이 어쩔 수 없이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알람브라가 이번에 우리가 만나게 될 유적이다.

■무어인의 쓸쓸한 퇴장

스페인 알람브라와 그라나다 시내 전경.
학창 시절이라고 해서, 역사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즐길 만한 놀이가 많지 않아서 였는지 학생들은 기타를 즐겨 치곤 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클래식 기타를 어느 정도 친다 싶으면 꼭 배우고 싶어 하는 기타곡이 있었는데, 바로 스페인의 타레가가 작곡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다. 처음 그 곡을 들었을 때의 떨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섬세하고 깊은 음색 속에 가느다란 줄을 타고 흐르는 듯한 애절함, 심장을 저미는 듯한 감정이 깃든, 그야말로 영혼을 울리는 선율이었다.

그리고 알람브라에 갔을 때, 그 기타곡이 왜 사람의 마음을 아리게 하는지 저절로 이해되었다. 누구에게나 헤어짐은 슬픈 법이다. 잠깐 머물다 간 인연도 떠나고 나면 마음이 허전한데, 하물며 수 세기 동안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며 찬란한 황금시대의 상징으로 남은 알람브라를 뒤로한 채 떠나야 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무어인들은 작별의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며 아프리카로 떠났다고 한다.

알람브라는 영광의 옛 주인과 이별한 뒤, 지금 그라나다 언덕 위에 의연히 서 있다. 헤어지고 긴 시간이 흘렀건만, 그 찬란했던 빛은 여전히 생생하다. 아직도 빛으로 살아 숨 쉬는 알람브라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눈다. 방어를 위한 요새 구역인 알카사바, 왕족의 생활 공간이었던 나스리 궁전, 그리고 헤네랄리페 정원이다. 본래 알람브라는 그라나다를 지키기 위한 요새로 시작했지만, 나스리 왕조가 궁전과 정원을 더하면서 찬란한 예술의 성채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무어인이 떠난 이곳에는 ‘찐’ 기독교 국가인 스페인이 세운 카를로스 5세 궁전, 산타 마리아 성당, 그리고 프란치스코회 수도원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알람브라는 요새와 궁전, 정원, 성당, 수도원이 어우러진 복합 유적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람브라 궁전’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전체 유적을 대표하는 나스리 궁전이 관용적으로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알람브라(Alhambra)’는 아랍어로 ‘붉은 요새’를 뜻한다. 점토 벽돌의 붉은 색조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름만 들어도 강력한 군사 요새의 기운이 느껴진다. 유럽 대륙은 좁은 땅에 많은 국가가 있다보니, 끊임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나라든 사람이든 너무 가까우면 부딪히고 상처 입기 쉽다. 그러니 다치지 않으려면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않는 편이 좋다. 적당한 거리가 이상적이겠지만, 경계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던 유럽의 나라들은 어쩔 수 없이 요새가 필수였다. 알람브라 역시 높고 단단한 성벽으로 멀리서도 적을 감시할 수 있는 탁 트인 전망을 갖춘 요새였다. 그라나다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고, 올리브 향의 바람도 불어왔다. 요새가 이토록 서정적인 풍경을 담고 있을 줄이야.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알람브라의 핵심은, 하늘의 별보다 더 빛나고 반짝이는 보석이 있는 곳, 바로 우리가 ‘알람브라 궁전’이라 부르는 나스리 궁전이다. 궁전의 벽면은 대부분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공간 전체를 신비롭고 영원한 질서로 가득 채우는 이 문양은, 단순히 아름답다고만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아라베스크는 누가 뭐래도 이슬람 미학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기하학적 패턴과 아랍어 서체가 끝없이 이어지는 선율 같은 무늬는, 마치 무한을 향해 흐르는 음악처럼 벽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것을 어떻게 장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생명의 언어라 해야 한다.

그리고 알람브라의 사진이나 홍보물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아라야네스’ 중정은 나스리 궁전의 기품을 한눈에 보여준다. 중정 연못 양쪽에 심어진, 이슬람 문화에서 ‘천국의 꽃’이라 불리는 ‘아라야네스’에서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 꽃과 함께 물에 비친 일곱 개의 ‘코마레스탑’ 아치는 한 폭의 그림이다. 이곳 중정에 있는 분수는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절제되어 차분하고 고요한 명상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알람브라에는 이 분수 외에도 다섯 곳이 더 있다. 단순히 장식용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라나다의 여름 기온이 40도를 넘는 까닭에 분수는 습도를 조절하고 더위를 식혀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건조한 지역이다 보니 물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으며, 복잡한 관개 시스템을 갖춘 뛰어난 건축 기술 덕분에 물관리도 탁월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물을 절묘하게 활용한 분수들은 알람브라를 더욱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12마리 사자상이 떠받치는 대리석 분수는 물의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절정이었다.

■예술의 경지에 오른 장식물

이제 나스리 궁전 사자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긴 호흡으로 마음을 잠깐 정리하는 것이 좋다. 궁전 전체가 예술이지만, 특히 이 공간은 궁전의 백미로 불릴 만큼 빼어난 곳이다. 두둥~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형상화한 듯 입체적으로 펼쳐진 천장의 ‘무카르나스’ 장식이다. 아랍어로 ‘조각된 것’을 뜻하는 벌집 같은 돌출부들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졌다. 이 장식은 햇빛과 바람이 자유롭게 스며들게 하여 공간 전체를 밝고 우아한 분위기로 연출해 냈다.

이곳은 빛으로 천상의 세계를 표현하려는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는데, 색채는 시간과 빛의 각도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하며, 마치 천국의 빛을 보여주는 듯하다. 빛을 활용해 공간에 깊이와 신비로움을 극대화하려는 건축가의 의도가 고스란히, 아니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섬세한 연출 속에는 이슬람 예술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자부심이 뚝뚝 묻어났다. 아, 도대체 어느 무어인의 솜씨란 말인가! 이러한 아름다움에 매혹된 수많은 예술가와 시인들, 그리고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의 선율마저 이곳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여기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 있다면 나와보라.

궁전을 나와, 나스르 왕조의 휴식처였던 헤네랄리페 정원을 걸어 보았다. 이 정원도 물을 중심으로 설계돼 향기로운 허브와 꽃들이 매혹적인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슬람 건축은 정원을 중시한다고 한다. 알람브라의 물과 정원의 아름다움은 훗날 인도의 타지마할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두 정원 모두 물을 중심으로 설계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원에서 바라본 궁전은 전체적으로 절제된, 담백한 인상을 준다. 일반적인 유럽의 궁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기능성과 실용성을 중시하며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진 요새여서 그런 것일까. 그렇다 해도 궁전의 외형은 화려한 장식이 거의 없고, 오히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다. 궁 내부의 화려함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고 할까. 내부는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외부는 수수하고 담백하기만 하다. 이중적 매력을 지닌 이 매혹적인 걸작은, 그래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매 순간 이별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추억으로 남는다. 추억은 기억 속에서 영원하다 했던가. 끝없이 이어지는 아라베스크 무늬처럼, 알람브라가 품은 추억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찬란하기만 하다. 인생에도 그런 찬란한 추억 하나쯤 가지고 싶다. 아름다운 추억은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기도 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지금도 알람브라가 저리 매혹적인 것을 보니, 분명 영광의 옛 주인과 나눈 반짝이는 추억을 여전히 꼭꼭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게다.

최진숙 전 영산대 글로벌학부 교수·‘세계10대유적지기행’ 저자·유적지 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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