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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람이 지배하는 고원에, 사람이 가른 국경이 있다

박선정 소장의 달리 인문여행 4 <중> 무르갑에서 호루그까지

  • 박선정 인문학당 달리 소장
  •  |   입력 : 2026-08-30 19:08:33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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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춘 요새(Yamchun Fortress)는 기원전 3~2세기 와한 교역로를 감시·방어한 고대 요새로, 이슬람화되기 이전의 이 지역 종교 문화 생활 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공간이다.
- 고원 무르갑서 하룻밤 보내고
- 아프간과 타지키스탄 가르는
- ‘국경선’ 파미르강 따라 내려가
- 집도 사람도 불빛도 없는 고요
- 달과 별에 의지해 랑가르 도착

판지강.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가르는 국경의 강이다.
세계의 지붕 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해발 약 3600m의 무르갑(Murghab)은 타지키스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도시이자 동부 파미르의 중심지다. 이 거친 땅에는 오랫동안 가축을 몰고 다니던 키르기즈 유목민이 살았다. 그러나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이 군사 거점을 세우면서부터 이곳에 군사적 의미가 더해졌다. 이후 1930년대 파미르 하이웨이가 건설되었다. 오쉬와 호루그를 잇는 길의 중간 지점이자 중국으로 향하는 길이 갈라지는 길목인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에서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컨테이너 바자르에서 만난 주민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을 키르기즈계라고 소개한다. 국경은 그들을 타지키스탄 국민으로 묶어놓았지만, 그들의 언어와 생활양식에는 국경이 생기기 전부터 이어져 온 키르기즈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공교롭게도 필자가 도착한 날, 무르갑의 중앙도로에서는 줄을 맞춘 군인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시민은 길가에서 이들을 향해 환호했다. 산은 이어지고 바람은 국경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달려온 파미르에서, 행진하는 군인의 모습은 묘한 긴장감마저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런 국가와 민족의 경계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장을 보고 양과 야크를 돌보며 고산의 희박한 공기를 함께 나누었다.

하룻밤의 인연을 뒤로한 채 다시 길을 나선다. 다시 황량한 고원이다. 인간의 흔적을 모두 지우개로 지운 듯한 세상은 평화롭기만 하다. 카르구시(Khargush)를 향하면서 길은 다시 해발 4000m를 넘는다. 그러다 높은 고개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서자 풍경이 바뀌기 시작한다. 끝없이 펼쳐지던 고원이 갈라지고 산과 산 사이가 좁아지면서 깊은 계곡이 생긴다. 그 계곡 아래로 강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파미르강이다.

파미르강은 해발 4130m 조르쿨 호수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흐르면서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이룬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쪽 와한(Wakhan)강과 합류해 판지(Panj)강이 된다. 며칠 동안 길 왼쪽을 지키며 여정을 함께할 강이다. 그러나 이 강은 그저 바라만 볼 수 있다. 들어가지도 건너지도 못한다. 두 국가를 구분 짓는 국경이기 때문이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은 타지키스탄이고 저쪽은 아프가니스탄이다.

강에 붙어 있는 산 중턱으로 좁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오른쪽에는 금방이라도 바위가 쏟아질 듯한 산이 솟아 있고 왼쪽 아래에는 거친 강물이 흐른다. 가파른 절벽에 겨우 길 하나를 파놓은 듯하다. 가드레일조차 없기에 자동차가 흔들릴 때마다 강물로 추락할 것 같다. 그런데도 시선은 줄곧 강 건너에 머문다. 그곳에서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자동차 창문 밖으로 팔을 내밀어 크게 손을 흔들어본다. 강 건너 사람도 손을 흔든다.

길 위 풍경에 종종 발이 묶인 탓일까. 마치 ‘가지 말라’고 소매를 잡는 칼립소의 유혹처럼, 갈 길은 먼데 길 위에서 해가 지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간다 해도 서너 시간은 더 가야 하는데 말이다. 이제는 강물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더욱 힘차게 들려오는 물소리만이 그곳에 여전히 강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줄 뿐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몇 m의 길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의 전부다. 집도 없다. 자동차도 없다. 사람도 없다. 당연히 가로등도 없다. 유일한 빛은 하늘의 달과 별, 그리고 자동차의 불빛뿐이다. 그런데도 하늘의 별빛이 너무 아름다워 가던 길을 멈췄다. 자동차 불빛을 끄고 잠시 우주 속으로 들어갔다. 원래 세상은 이렇게 고요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것인가.

하지만 길 위에서 멈출 수는 없다. 마을까지 내려가야 한다. 어둠과 함께 밀려드는 고요한 불안감 속에서 묵묵히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키 큰 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무들 사이로 불빛이 보였다. 드디어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랑가르(Langar)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이곳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랑가르는 파미르강과 와한강이 만나 판지강으로 이어지는 합류 지점과 가까운 마을로, 동부 파미르의 황량한 고원에서 서쪽 와한 계곡의 정착지대로 들어서는 관문과도 같은 곳이다. 계곡에는 나무가 있고 작은 밭들이 있다. 물이 있고 흙이 있으니 마을이 생겼다. 그리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니 역사가 남았다.

랑가르 마을이 자리한 와한 계곡(Wakhan Valley)은 오늘날에는 세상의 지붕 위 변방처럼 보이지만 오래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와 중국, 아프가니스탄과 인도를 잇는 오래된 길들이 이곳을 지나갔다. 사람과 물자가 이동했고 종교와 문화도 이동했다. 그래서 이곳 작은 마을을 따라가다 보면 뜻밖에도 오래된 성채와 암각화, 불교 유적과 이슬람 성소를 만난다. 랑가르 마을 뒤편의 거대한 바위산에 산양과 사냥 장면, 여러 시대의 기호와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바위 위에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브랑(Vrang) 마을 뒤 언덕에 남아 있는 불교 유적이다. 계단식 불교 석탑과 수행 공간으로 추정되는 동굴들이 마을 뒤 높은 언덕에 남아 있다. 이슬람이 이곳에 자리 잡기 이전에 불교 문화가 와한 계곡까지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인근에 와한 계곡에서 가장 인상적인 유적 가운데 하나인 얌춘 요새(Yamchun Fort)가 있다. 요새의 기원은 기원전 수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 여러 시대에 걸쳐 증축과 개축을 거친 것으로 추정된다. 수십 개의 감시탑과 두꺼운 성벽이 산의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 침략자들로부터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계곡을 오가는 사람과 물자의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정상의 높은 망루에 서면 발아래로 판지강이 내려다보이는데, 강 너머로 아프가니스탄이, 그 뒤로 힌두쿠시의 눈 덮인 산맥이 병풍처럼 눈에 들어온다. 이 높은 곳에 성채를 세운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게다가 인근에 온천도 있다. 얌춘 요새 뒤 험준한 산세 속에 숨어 있는 비비 파티마(Bibi Fatima) 온천이 그것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이름을 딴 이 온천에 오래전부터 치유와 다산을 둘러싼 여러 전승이 전해진다. 빛과 유황빛의 천연 암벽은 마법을 부리듯 그 틈새로 따뜻한 물을 내놓는다. 수천 년간 이곳을 지나간 다양한 사람들에게 물은 그렇게 환대로 답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치유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었으리라. 이처럼 이 지역에 이슬람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했다. 불교가 지나갔고 조로아스터교로 추정되는 고대 이란계 종교의 흔적과 전승도 남았으며, 이후 이슬람이 사람들의 삶 속에 자리 잡았다.

온천을 내려와 판지강을 따라 이제 서쪽으로 향한다. 강은 처음보다 훨씬 넓어졌다. 계곡도 넓어지고 마을도 자주 나타난다. 나무가 많아지고 밭도 커진다. 동부의 황량한 고원에서는 귀하던 초록색이 곳곳에서 보인다. 초록과 강물과 벗하며 길을 따라가면 이쉬카심(Ishkashim)이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강 건너 아프가니스탄에도 같은 이름의 마을이 있다. 하나의 강을 사이에 두고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마을이 서로 다른 나라에 속해 있다. 강 위에는 다리가 놓여 있다. 하지만 주말에 주민만 건널 수 있는 다리다. 주말이면 국경을 사이에 둔 두 국가 주민이 만나는 바자르가 열린다. 국경이 그어지기 훨씬 전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강을 오가며 물건을 사고 사람을 만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만 서로를 만날 수 있다.

이쉬카심을 지나자 길은 판지강을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튼다. 강은 여전히 왼편에서 흐르고 그 너머 아프가니스탄의 산과 마을도 계속해서 따라온다. 저 강물은 알고 있을까. 자신이 국경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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