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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세계의 지붕 파미르…그곳에 사는 강인한 사람들

박선정 소장의 달리 인문여행 4 <상> 키르기스스탄에서 타지키스탄으로

  • 박선정 인문학당 달리 소장
  •  |   입력 : 2026-08-23 19:17:37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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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미르 하이웨이를 달리다 만난 파미르고원 최대 호수 카라쿨호. 깊고 짙은 푸른색 호수 뒤로 웅장한 설산이 솟아 있다.
- 해발 2500m 고개 대신 터널
- 느림의 공간서 ‘빨리’로 변모

- M41 하이웨이가 된 실크로드
- 유목민·순례자 걸음 층층 쌓여

- 혹독한 자연 견뎌낸 고원 도시
- 이곳에도 공 차는 아이들 웃음

필자는 지금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코크아르트(Kok-Art) 터널이다. 해발 2500m가 넘는 코크아르트 고개 아래를 관통하는 3.89㎞ 길이의 터널로, 키르기스스탄의 북부와 남부를 새롭게 연결하는 ‘북~남 대체도로’의 핵심 구간이다.

아직 완성된 길은 아니다. 전체 도로의 정식 개통은 2028년으로 예정돼 있지만, 올해는 여행객과 차량 이동이 많은 6월부터 11월까지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만 임시로 길을 열었다. 터널로 들어서자 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자동차 불빛이 그 사이로 희미하게 번진다. 그런데도 왕복 2차로의 터널 안에는 이 새로운 길을 이용하려는 자동차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느림’에서 ‘빨리’로

이 도로가 완성되면 이식쿨 서쪽의 발릭치에서 잘랄아바트까지 이동 시간이 약 13시간에서 6시간 정도로 줄어든다. 높은 산들이 국토를 갈라놓았던 키르기스스탄에서 코크아르트 터널은 북부와 남부, 동부와 서부를 이어주는 새로운 통로 역할을 하게 됐다. 이와 함께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고개를 오르고 내리던 기억도 언젠가는 전설이 될지도 모르겠다. ‘느림’의 공간이었던 이곳 역시 점차 ‘빨리’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키르기스스탄 남쪽 국경 너머의 타지키스탄이다. 비슈케크에서 출발해 이식쿨을 따라 카라콜까지 동쪽으로 갔다가 다시 서쪽과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코크아르트 터널을 지나 잘랄아바트를 거쳐 오쉬로 내려가기 위해서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육로로 타지키스탄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서쪽 바트켄 지역에서 국경을 넘을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새로 뚫린 터널을 직접 지나 보고 예전에 인연을 맺은 사리모골 사람들에게 다시 인사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부의 중심도시 오쉬에서 사리타시와 사리모골을 거쳐 파미르 고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사리모골(Sary-Mogol)은 알라이 계곡에 자리 잡은 고산 마을이다. 마을 앞에 서면 남쪽으로 거대한 트란스알라이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그 가운데 해발 7134m의 레닌봉이 솟아 있다. 그 눈 덮인 봉우리를 바라보며 한여름에도 유르트 안 이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잠을 청해야 하는 곳이 툴파르콜이다.

사리모골에서 하룻밤, 툴파르콜에서 또 하룻밤을 묵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고도다. 앞으로 지나가야 할 길은 대부분 해발 3000m 이상이고 4500m 이상의 고개도 넘어야 한다. 아무리 터널이 이동의 시간을 빠르게 돌려놓았다 한들 인간의 몸은 자연의 시간을 따라야 한다. 고도 앞에서 서두르면 탈이 난다. ‘빨리빨리’ 파미르로 들어가는 대신 내 몸에 적어도 이틀의 적응 시간을 주기로 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타지키스탄으로 넘어가는 국경인 키질아르트 고개 인근에 설치된 국경 표지석. 가둥 형태의 구조물에 키릴 문자로 ‘타지키스탄’이라고 새겨져 있다.
■‘세계의 지붕’을 향해

고도는 숫자로 이해할 때와 몸으로 경험할 때 전혀 다르다. 평지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던 한두 걸음에도 몸이 무겁고 숨이 가빠진다. 머리도 묵직해진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공기에 의존하고 있는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다. ‘고도’는 평소에는 존재조차 의식하지 않던 소중한 것의 존재를 깨닫게 만드는 스승이기도 하다.

고도 적응을 위해 머물렀던 툴파르콜과 사리모골을 떠나 다시 오쉬로 돌아왔다. 오늘날에도 오쉬는 여행객들에게는 마지막 준비 기지와도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차량을 꼼꼼하게 정비하고, 고원에서 살아남기 위한 물품과 비상식량을 챙긴다. 타지키스탄에서 사용할 현금도 준비해야 한다.

오쉬를 빠져나와 산맥 사이로 난 메마른 길을 한참 달리다 보면 다시 자그마한 마을 하나가 나타난다. 사리타시(Sary-Tash)다. 타지키스탄 국경으로 향하기 전 만나는 마지막 주요 마을이다. 다시 물과 기름을 보충하고 비상식량을 챙긴다. 이제 정말 ‘세계의 지붕’으로 올라갈 것이다.

파미르는 타지키스탄을 중심으로 키르기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중국의 신장 지역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산악지대다. 7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솟아 있고, 사람이 살아가는 땅조차 해발 3000~4000m에 이른다. 그 고원을 관통하는 길이 파미르 하이웨이다. 오늘날 지도에서는 M41이라는 무미건조한 도로 번호로 표시되지만, 이 길과 주변의 오래된 통로에는 실크로드의 대상과 제국의 군대, 유목민과 순례자들이 지나간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다.

파미르를 왜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를까. 해발 7000m가 넘는 높은 산들이 솟아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지붕은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의 가장 높은 곳이며,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는 사람이 쉽게 닿을 수 없는 공간이다. 그곳은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 아니다. 날렵한 동물이나 자유로운 날짐승들이 주로 머무는 곳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그 위에 서면 아찔한 어지러움을 느낀다. 그래서 탁 트인 풍광과 해방감에 취해 올라갔다가도 이내 내려오게 된다. 파미르가 딱 그렇다.

키질아르트(Kyzyl-art) 고개는 해발 4200m가 넘는다. 이 높은 고개를 사이에 두고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의 국경이 갈린다. 산도 이어져 있고 하늘도 하나인데, 인간은 그 위에 선을 긋고 이쪽과 저쪽을 서로 다른 나라라고 부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권을 내밀고 여러 차례 검문 과정을 거치면서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이제 타지키스탄 땅이다. 역시나, 국경은 넘었지만 자연은 그대로다. 그래서일까.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낡은 철조망마저 나라와 나라를 가르는 경계라기보다 그저 들판 한쪽에 세워둔 울타리처럼 보인다.

파미르 하이웨이를 달리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압도되는 것은 산의 높이보다 오히려 공간의 크기다. 산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타나고, 그 너머에는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고원이 펼쳐진다. 길은 그 거대한 풍경 속에 가느다란 선 하나를 그어놓을 뿐이다.

그 황량한 풍경과 높이 때문에 설마 하지만 뜻밖에도 물을 자주 만난다. 파미르에는 높은 산들 사이로 크고 작은 호수들이 흩어져 있다. 하늘빛에 따라 푸른색에서 짙은 남색으로, 때로는 옥빛으로 변하는 물이다. 말 그대로 하늘을 그대로 품은 물빛이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와 자전거 여행자들이 흙 위에 남긴 바퀴 자국 외에는 인간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곳이다. 호수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물빛만큼이나 깊은 겸손 하나를 마음에 품게 만드는 곳이 이곳이다.

■황량한 고원에도 ‘생명’이

이곳 호수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이 카라쿨(Karakul)이다. 이름은 ‘검은 호수’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마주한 물빛은 검다기보다 깊고 짙은 푸른색이다. 해발 약 3900m 높이 위에, 거대한 바위산들에 둘러싸인 고원 한가운데 호수가 놓여 있다. 카라쿨이 자리한 거대한 원형 분지는 오래전 천체의 충돌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돼 온 곳이다. 그 기원을 둘러싼 학술적 논의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어쩐지 천체 충돌설을 믿고 싶어진다. 이야기가 이 호수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카라쿨을 뒤로하고 다시 남쪽으로 향한다. 다시 황량한 고원이다. 산 하나를 돌아서면 또 다른 산이 나타나고, 그 사이로 난 길은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그 길의 가장 높은 곳에 악바이탈(Ak-Baital) 고개가 있다. 해발 약 4655m다. 파미르 하이웨이의 최고 지점이다. ‘악바이탈’은 ‘흰 암말’이라는 뜻이지만 정작 말은 없다. 낮은 풀조차 거의 없이 돌과 자갈이 맨살처럼 드러난 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황량한 곳에도 생명은 산다. 이곳은 다람쥣과에 속하는 마모트들의 독점 천국이다. 고개를 넘어서자 길은 조금씩 낮아진다. 그래본들 해발 3000~4000m의 고원이다. 얼마를 달렸을까.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황량한 고원에 불쑥 인간의 흔적이 나타난다.

무르갑(Murghab)이다. 해발 약 3600m. 동부 파미르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자 이 높은 고원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중심지다. 낮은 집들이 황량한 산 아래 겸손하게 몸을 낮춘 채 옹기종기 모여 있고, 시장에는 오래된 컨테이너들이 가게가 되어 줄지어 있다. 도시라기보다 거대한 고원 한가운데 사람들이 사는 작은 삶의 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곳에서 아이들은 공을 차고 술래잡기를 하며, 어른들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집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여행객들에게는 가쁜 숨을 내쉬게 하는 해발 3600m의 고원이 누군가에게는 태어나고 자라고 밥을 먹고 아이를 키우며 늙어가는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다.

파미르를 ‘세계의 지붕’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붕은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지붕 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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