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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 깃들기 시작한 미당시문학관의 뜰에서 찍은 문학관 전경 사진이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질마재로에 자리한 미당시문학관 근처에는 미당의 생가와 묘소도 함께 있다. 필자 제공 |
- 전북 고창 갯가 너른 벌에 자리
- 근처 생가·묘소까지 어우러져
- 서정주 시인 생애 한눈에 담겨
- 생명에 대한 경탄·존재의 긍정
- 언어 연금술사처럼 詩로 표현
- 여전히 논쟁중인 친일작품 11편
- 강압에 지조 꺾인건 아니었을까
■미당시문학관으로 가는 맑은 길 |
| 미당 서정주 |
그날따라 하늘이 높고 바람이 맑았다. 질마재 고샅길을 따라 바람이 먼저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의 길을 천천히 밟으며, 전북 고창의 갯가 너른 벌에 자리한 미당시문학관에 들어섰다. 부관장으로 있는 함명춘 시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와 해설사분의 안내를 받으며, 그동안 몇 차례 둘러본 바 있는 문학관을 새롭게 살폈다.
그곳은 단순한 문학관이 아니었다. 한 시인의 숨결이 흙이 되고 나무가 되고 하늘빛이 되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이었다. 시인의 고향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이 문학관은 폐교를 고쳐 만든 공간으로, 생가와 묘소까지 인근에 함께 어우러져 마치 시인의 생애를 통째로 안고 있는 듯했다. 이름 있는 건축가 김원의 설계로 세워진 5층 문학관은, 기품이 있었으나 좀 좁은 느낌이었다.
이 향리에서 미당 서정주 시인은 1915년 6월 30일에 태어났고, 2000년 12월 24일 향년 86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공부했고,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된 후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다. 1941년 ‘화사집’을 시작으로 ‘귀촉도’ ‘서정주시선’ ‘신라초’ ‘동천’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서으로 가는 달처럼…’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안 잊히는 일들’ ‘노래’ ‘팔할이 바람’ ‘산시’ ‘늙은 떠돌이의 시’ ‘ 80소년 떠돌이의 시’ 등 모두 15권의 시집을 간행했다.
이 전체 시집 제목을 여기에 모두 적은 것은, 그 가운데 하나도 빼놓을 수가 없어서다. 시인은 1954년 예술원 창립회원이 되었고 동국대 교수를 지냈으며 사후에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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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화 옆에서’를 비롯한 미당의 시가 미당시문학관 안에 전시돼 있다. |
■미당의 생애와 그 문학사적 의의필자가 아직 봄날 새벽처럼 청청하던 대학 1학년 때 일이다. 초봄의 화향(花香)이 번지고 있던 캠퍼스에서, 당시 그 이름이 꽤 알려진 일군의 시인들이 미당 화형식을 하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분개했다. 사람을 태우다니!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의식은 미당의 사회적 악역에 대한 징치(懲治)가 아니었다. 미당의 시가 가지고 있는 그 완강한 미학적 완결성의 장벽 앞에서 시를 쓸 용기를 내지 못하겠다는 절규였으니, 한 시인에 대한 그보다 더 적극적인 존경은 없을 터였다.
그 화형식은 불가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거나, 엔도 슈샤쿠의 ‘침묵’에서 예수의 얼굴을 밟는 ‘답화(踏畵)’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한국 현대시가 오늘에 이르도록 미당을 거치지 않고 올 길은 없는 형국이 아닌가.
미당은 나라가 일제에 병탄된 5년 후, 우울과 낙망, 그리고 방황과 반항의 시대적 숙명을 안고 이 땅에 왔다. 거기에 문필의 천부적 재능을 덧입었으니 운명적으로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23세 때 쓴 시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고 토로한 것은 이와 같은 상황의 저변 심리를 짐작케 한다. 27세 때 낸 첫 시집 ‘화사집’은 한국 현대시사의 흐름을 바꾸어놓는 첫 단추가 되었다.
시인은 60년에 걸쳐 1000편에 가까운 시를 썼는데, 겨레의 전통적인 정서와 언어를 가장 서정적이며 품격 있게 형상화한 범례에 해당한다. 그가 소환하여 사용한 시어들은 어느덧 수범(垂範)이 되고 금언(金言)이 되고 전설이 되었다.
■미당 시문학의 세계관과 생명력 |
| 시 ‘동천(冬天)’을 새긴 둥근 시비. |
미당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은 생명에 대한 경탄과 존재에 대한 긍정이다. 그의 시는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 현실과 초월의 경계를 엄격히 나누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존재가 거대한 생명의 순환 속에서 서로 스며들고 이어진다고 본다. 이러한 세계관은 그의 시에서 원초적인 생명의 기운과 우주의 질서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힘이 된다.
그의 시 세계에는 한국적 샤머니즘과 불교의 윤회 의식이 깊이 배어 있다. 그러기에 인간의 삶이 한 번의 과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순환하고 변용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 시가 죽음을 노래할 때도 절망보다 평온의 정서가 앞서며, 여기서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독창적인 생명력이 담보된다.
그 시 세계를 몇 가지 구분으로 대별해 보면, 먼저 토속성과 한국적 정서를 보여주는 시들이 있다. ‘화사집’이나 ‘귀촉도’에서 볼 수 있는 고창 들판, 선운산, 질마재 마을, 민간 신앙, 무속적 상상력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어서 강렬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시들이다. ‘자화상’이나 ‘화사’ 같은 대표적인 시에 나타나는 생명에 대한 원초적 에너지와 강렬한 욕망을 말한다.
그런가 하면 음악성과 아름다운 언어의 시들이 있다. 예컨대 ‘국화 옆에서’를 읽을 때와 같이 마치 노래를 듣는 듯한 운율이 느껴지는 경우다. 그리고 동양적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시들이다. ‘신부’나 ‘동천’과 같은 시에서 나타나는 삶과 죽음, 윤회와 초월 등의 문제를 일컫는다. 이 시들의 언어적 경향을 종합한 ‘언어의 연금술사’나 ‘우리말의 마술사’ 같은 별호가 그의 것이다.
■문필봉 산자락에 남은 이야기들문학관 본관 건물의 좁은 계단을 올라 4층에 이르면, 거기 미당의 업보처럼 남아 있는 7편의 친일 작품이 게시되어 있다. 미당이 일제강점기에 쓴 친일 작품은 모두 11편. 시골 마을의 이름 없는 시인이었으면 누구나 그러려니 했을 터인데, 미당이기에 이제까지 ‘뜨거운 감자’의 존재 양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 감성적이고 섬약하여 외형적인 강압을 감당하지 못한 시인의 훼절을 이제는 넉넉하게 품어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어느 누구에게나 그 삶의 명암이 있고 공과가 있다. 문학에 있어서 이광수와 최남선이 그러했고, 정치에 있어서 이승만과 박정희가 그러했다. ‘과’만 보고 ‘공’을 버리는 일도양단의 흑백논리를 넘어서, 그 양자를 함께 판단하는 균형감각이 필요할 듯하다. 미상불 미당은 열다섯의 나이에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한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속되고 퇴학당한 전력도 있다.
‘미당(未堂)’이라는 호는 ‘아직 덜된 사람’이라는 겸손한 마음과 ‘영원한 소년’이고자 하는 정신적 의지가 담겨 있어, 늘 새로운 세계를 추구한 시인의 삶과 잘 어울린다. 아마도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가 ‘위대한 시인이면서 논쟁적 인물’이라는 복합적 평가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쨌거나 김소월 윤동주 한용운 등과 함께 한국 현대시사를 말할 때 어떤 경우에라도 건너뛸 수 없는 우리 문학의 대표 시인임은 삼척동자도 부정할 수 없는 형편이다.
초여름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날, 미당시문학관을 찾아간 길에 남은 생각은 문학관 하나를 보고 온 것이 아니라 한 시인의 생애가 흘러간 그 물결을 보고 온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질마재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요산 문필봉의 그윽한 눈길이, 끝내 말없이 떠나는 발걸음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