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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아이라는 이름의 북 /조현숙

  • 조현숙
  •  |   입력 : 2025-12-31 17:55:58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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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의장군이 북 매달은 나무
- 다들 현고수라고 부른단다

- 아들 사고 났을 때 앞이 캄캄
- 손자 지켜야 하니 힘이 나요

- 아빠가 올 때까지 북 쳐야하는데
- 울 강아지 꿈 꿨구나 … 다시 잘래
- 젊은 남자네, 먼 길을 걸어왔나봐

“어째 현고수는 아직 잎도 안 틔웠을까요?”

산하 할머니가 날 힐끔 보면서 말했어.

“그러게. 봄이 온 지가 언젠데. ”

연주 할머니가 맞장구를 쳤어.

“긴 겨울 넘어오느라 힘에 부쳤나 봐요.”

“그렇겠지. 저 봐. 몸통도 비었고 나이는 오죽 많아.”

할머니들 흰 머리카락 위로 봄 햇살이 반짝거렸어.

‘체, 자기들은 뭐 안 늙었나.’

명주바람이 혀를 차는 날 슬쩍 흔들고 지나갔어. 며칠 전부터 공원 정비 작업을 하러 오는 할머니들이야.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덕에 심심하지 않아서 좋긴 해. 산하는 올 초에 아빠와 헤어져 할머니한테 왔대. 연주는 예전부터 이 마을에서 삼대가 같이 살고. 둘 다 올해 햇살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1학년이 달랑 둘 뿐이라 단짝이 됐대. 난 혼잔데.



“띠링띠링”

아휴, 깜짝이야. 연주 할머니 핸드폰 소리잖아.

“애들 데리러 못 간다고? 그래, 알았다.”

연주 할머니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어.

“연주 어미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애들끼리 오라고 했다네.”

“집까지 걸어 오려면 제법 걸릴 텐데요.”

“둘이 같이 오는데 놀며 쉬며 오겠지.”

저 핸드폰 참 신통도 하지. 그 시절에도 저게 있었다면 의병들을 모으기 위해 내 허리에 북을 매달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때가 정말 좋았거든. 둥둥 울려 퍼지던 북소리와 의병들의 뜨거운 함성이 날 들뜨게 했어. 온몸으로 전해지던 떨림은 또 어떻고. 나라를 지키는데 한 조각 도움이 됐으니 이만한 삶도 없을 거야.

‘근데 요즘 나 왜 이러지? 나른해’.

산등성이에는 연초록이 번지고 눈앞에선 철쭉꽃이 방긋거려. 그때도 봄이었지. 벅찼던 그 봄을 기억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기운이 없을까? 꽃도, 잎도 피우기 싫고 담장 아래 고양이들처럼 졸음이나 오고 말이야.

현고수로서 명성도 자자했지만 아득한 세월이잖아. 옹이 지고 휜 몸으로 균형을 잡아가며 사느라 안간힘 썼던 세월이야. 마을 사람들이 가지에 지주도 받쳐주고 곪아 터진 몸도 치료해 주면서 보살펴 준 살뜰한 정을 생각하면 기운을 내야 하는데 자꾸만 까라지네.



산하 할머니가 허리를 펴다가 저만치서 걸어오는 연주를 보고 소리쳤어.

“왜 너 혼자야? 우리 산하는?”

“아빠 만난다고 버스 타러 갔어요.”

“뭐? 거기가 어딘지 알고. 야가 기어이 사고를 치네.”

산하 할머니가 허둥거렸어.

“형님, 나 좀 가볼게요.”

“그래. 빨리 가봐. 아무 버스나 타면 큰일이잖아.”

산하 할머니가 큰길 쪽으로 내달았어. 연주 눈이 동그래졌어.

“할머니, 내가 잘못한 거예요? 산하랑 같이 안 와서?”

“아니야. 걱정 말고 집에 가 있어. 할미 일 끝나면 바로 갈게.”

연주가 마을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 연주 할머니가 중얼거렸어.

“며칠 전에도 산하가 제 아빠한테 가겠다고 떼를 썼다더니, 하긴 어린 게 아빠가 얼마나 보고 싶을까.”



며칠 전, 마을 어귀에서 떼를 쓰며 울던 그 꼬마가 산하였구나. 어? 근데 나는 왜 이러지? 갑자기 발꿈치에 힘이 들어가는걸. 까라지기만 하던 몸이 꿈틀대잖아. 같이 산하를 찾고 싶어서 그런 걸까.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아무 버스나 덜컥 타면 안 되는데. 어라? 시들하던 가슴도 콩닥거리네.



‘산하 할머니다’.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할머니가 보여. 산하를 업고 오네. 다행이다, 만나서. 그런데 희한하지? 할머니 등에 업힌 산하가 작은 북 같아. 내가 너무 늙어서 헛것이 보이는 걸까? 아니야. 북 맞아. 나는 내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내 등에 매달았던 북도 저랬을 것 같아. 나와 북이 하나가 되어서 같이 울렸는걸. 사람들은 알까? 몸통과 가지와 줄기, 잎으로 흐르던 북소리를? 그 북소리가 나를 지탱하는 힘이었다는 걸?

연주 할머니가 쫓아가서 산하 등을 토닥이며 말했어.

“어휴, 다행이네. 금방 애를 찾아서.”

“막상 저도 겁이 났던지, 버스 꽁무니만 멀거니 보고 있더라고요.”

“그냥 집에 가지 뭐 하러 왔어. 산하가 많이 놀랐을 텐데.”

“하던 일을 놔두고 어떻게 그냥 가요.”

“내가 마무리하면 될 거를, 참 융통성도 없는 할마씨야.”

산하 할머니가 배시시 웃으면서 산하를 내 둥치 아래로 데려왔어. 웃옷을 벗어 땅에 펴고 그 위에 산하를 앉히면서 다독이듯 말했어.

“이 나무는 홍의장군이 북을 매달았던 느티나무야. 다들 현고수라고 부른단다.”

현고수, 산하가 중얼거렸어.

“조금만 앉아 있어. 여긴 햇살이 따뜻하니까. 할미 금방 일 마칠게. 아까도 말했지만 다시는 니 마음대로 혼자 다니면 안 돼. 그러다 길 잃어버리면 어쩔 거야?”

네, 산하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어. 그리고 물었어.

“왜 나무에 북을 매달았어요?”

“의병들을 모으려고. 옛날에는 사람들을 모으는데 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단다. 북소리는 멀리까지 둥둥 울리니까.”

“의병이 뭔데요?”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 스스로 일어난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그럼 울 아빠도 의병이네.”

“응?”

“아빠도 나랑 할머니를 지키기 위해 먼 데까지 일하러 간 거잖아요.”

“그렇지. 맞아. 어쩜, 신통하기도 하지.”

이제 걱정이 사라진 듯 산하 할머니가 소리 내서 웃었어.



두 할머니는 흙을 고르고 돌멩이들을 한쪽으로 치웠어. 연주 할머니가 말했어.

“자네도 늘그막에 고생이네. 아들 사고 나서 그렇게 맘고생을 하더니만.”

“고생은요, 지켜야 할 손자가 있어서 살맛이 나는걸. 아들이 사고 났을 때도, 산하를 맡기러 왔을 때도 앞이 캄캄했죠. 근데 우리 산하를 보고 있으면 힘이 나요. 따뜻해져요. 저 아이를 지켜야 하니까 절로 힘이 나요.”

지켜야 할 게 있어서 살맛이 난다고? 힘이 나고 따뜻해진다고? 그렇지. 아무리 힘들어도 지켜야 할 것이 있으면 그래지지. 그때 우리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북을 울렸으니까.

“어쩐지 자네 얼굴에 웃음살이 환하더라.”

“그래 보였어요?”

할머니들 웃음소리가 햇살 속으로 잔잔하게 퍼졌어.



산하가 내게 스르르 기댔어. 따뜻하게 녀석을 감싸주고 싶어서 팔을 들었어. 그러다 슬그머니 내려놓고 말았어. 빈 가지잖아. 잎눈도, 꽃눈도 피워내지 않았는데 뭐로 감싸주겠어. 이제야 후회되네. 어떡하지. 녀석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서 몸이 간질거리는데.

산하가 내 발등을 만지면서 중얼거렸어.

“왜 이렇게 발이 못생겼지? 울 아빠 발도 그런데. 허리도 굽었네. 울 아빠도 사고가 나서 허리를 다쳤는데. 그래서 공장에서 쫓겨났는데. 맨날 힘든 일만 하다가 그렇게 된 건데. 이 나무도 너무 힘들겠다.”

산하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어. 그 눈망울에 가슴이 쿵, 울렸어.

‘그래, 나도 그렇단다’.

힘들겠다고 말해주는 그 말이 어찌나 따뜻한지 온통 떨렸어. 나는 뿌리에 힘을 줬어. 땅을 깨웠어. 있는 힘을 다해 가지를 뻗쳤어. 웅크리고 있던 생기가 일제히 몸을 일으켰어. 수관을 활짝 벌리고 물을 끌어 올렸어. 부지런히 물을 날라 새잎의 싹을 틔웠어. 꽃눈을 깨웠어. 내 안의 북이 소리를 내려고 꿈틀거렸어.



할머니들이 엉덩이를 털면서 일어났어. 일이 끝났나 봐.

“원, 그새 잠들었네. 산하야, 일어나라. 집에 가자.”

할머니 손길에 풋잠을 자던 산하가 눈을 떴어. 햇살이 눈을 찌른 듯 눈살을 찌푸리면서 두리번거렸어.


“할머니, 북은?”

“북이라니?”

“분명 나무에 매달려 있었는데. 아빠가 북소리를 들으면 온다고 해서 정신없이 쳤는데. 아이 몰라. 왜 깨웠어. 아빠가 올 때까지 쳐야 하는데.”

“울 강아지, 꿈을 꿨구나.”

“어떡해. 난 몰라. 다시 잘래.”

할머니가 산하를 달래서 돌아갔어. 아쉬운 듯 자꾸만 돌아보는 산하가 또 올게, 그러는 것 같았어.



화창한 봄날 아침이야. 명주바람이 불어왔어. 내가 피운 연둣빛 이파리들이 살랑거렸어. 작은 꽃들이 흔들렸어. 할머니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어.

“어? 현고수 좀 봐요. 잎이 나왔어요. 꽃도 피었고요.”

“세상에, 새들새들하더니 이렇게 장하게 살아났네.”

“현고수요, 고맙소. 겨울을 잘 나 줘서.”

할머니들이 활짝 웃으면서 저편으로 걸어갔어. 이곳 정비 작업이 끝나는 바람에 딴 데서 일하거든. 연주 엄마 차도 지나갔어. 산하와 연주가 있으려나, 안 그래도 굽은 등을 더 구부려서 차창 안을 들여다봤어.



오랜만에 산하와 연주가 왔어. 어찌나 반가운지 소리 지를 뻔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 푸르른 잎을 가득 안은 팔을 한껏 벌려서 아이들을 맞았어. 산하가 조그만 북을 가져와 내 팔에 매달았어. 연주가 들고 있던 북채로 북을 쳤어. 북소리가 울려 퍼졌어. 아이들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어.

“큰북을 울려라 둥둥둥, 작은 북을 울려라 동동동.”

녀석들은 북을 치면서 한참 놀았어. 연주가 산하한테 말했어.

“근데 여기서 친다고 너의 아빠한테까지 들리겠냐?”

“그럼, 너랑 같이 치면 들릴 거야.”

어쩌면 사람들은 우리가 지켜낸 의병 정신 같은 건 잊어버렸는지도 몰라. 그러면 뭐 어때. 이 아이들이 있잖아. 이 아이들이 품고 있는 소망처럼 그날의 북소리도 조금씩 자라지 않겠어? 또 기다려볼까. 산하의 마음에,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이라는 북이 울려 퍼지는걸.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북소리가 신명 나게 울렸어. 아이들 머리 위로 하루를 완성하는 석양이 붉게 타올랐어.



지금도 내 몸에서 북소리가 나는 것 같아. 녀석들이 어지간히 불러제꼈어야지.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다니까.

“큰북을 울려라 둥둥둥, 작은 북을 울려라 동동동.”

이제 나는 꿈을 꿔. 날마다 산하랑 연주가 찾아와 북을 매달고 노래 부르는걸. 그러면 나는 가뿐하게 발꿈치를 들고 잎을 피우고 물들게 하고 새들을 불러 모을 거야.

풋, 웃음이 나오네. 며칠 전, 산하가 와서 나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갔거든.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그렇게 북을 쳤는데도 아빠 소식이 없잖아. 이 엉터리 현고수야.”

벌게져서 성질을 내는 산하 어깨에 나뭇잎을 스르르 날려줬어. 손을 흔들어줬어. 그만해. 연주가 산하 등짝을 때렸어. 나는 이 아이들 때문에 살고 싶어. 이 아이들은 그날의 북처럼 나에게 뜨거운 힘을 줘. 날 의연하게 만들어줘.



어라? 누구지? 젊은 남잔데. 먼 길을 걸어왔나 봐. 지쳐 보여. 그래도 얼굴에 웃음살이 가득해. 저 얼굴 낯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남자가 잠시 서서 숨을 고르더니 마을 안쪽으로 갔어. 참을 수 없다는 듯 남자가 뛰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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