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노동’을 다루는 한국영화의 일반적인 태도에는 모종의 불편함이 있다. ‘다음 소희’(2023)나 ‘젊은이의 양지’(2020)와 같은 일련의 독립영화 작품. 물론 이들이 부조리한 환경에 처해 열악한 처우를 받는 이들의 현실, 사회구조적 문제점을 고발하고자 하는 선의의 산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세계를 개선시키고자 하는 그대의 눈빛이 나를 근심스럽게 한다’(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는 표현처럼 문제는 태도와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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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희 감독의 수작 ‘3학년 2학기’. |
위로부터의 시선. 사회초년생인 등장인물들은 반드시 죽음에 이르는 비극을 겪도록 운명 지어져 있으며, 이들의 억울한 현실을 밝히고 개선하는 건 오로지 양심적인 기성세대의 각성에 의해서 가능해진다는 식인데, 여기에는 ‘청년’과 ‘노동’을 ‘아랫사람’ 또는 ‘천역(賤役)’으로 바라보는 한국사회 일반의 전근대적 무의식이 깔려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2025)는 이와 같은 관성에서 벗어난 한국 노동영화, 그리고 청년영화의 개가(凱歌)이다. 영화는 이제 막 청소년기를 벗어나 성년의 첩경에 접어드는 특성화고등학교 출신 젊은이들의 사회생활 적응 과정을 비춘다. 여기에는 신파에 가까운 과잉된 비극성도, 정의로운 기성세대나 도식화된 악역의 개입도, 극적 반전도 없다. 그런데 담담한 재현의 리얼리즘이 도리어 기묘한 장르성으로 다가오는 웃지 못할 역설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창우(유이하)는 공장에서 작업 도중 실수로 다치지만, 흔히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낼 극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 탓에 꼭 집어넣곤 하던 치명적인 사건은 터지지 않고, 때문에 관객은 언제 문제가 터질지 노심초사하는 긴장감으로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된다.
학교친구인 우재(양지운), 공장에서 만난 성민(김성국)과 다혜(김소완)를 통해 저마다 다른 인생행보를 하는 청춘 군상을 보여주지만, 영화의 중심인물은 창우이다. 얼핏 보면 창우는 전혀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는다. 뚜렷한 목적의식이나 계획이 없고 감정표현은 미숙하고 숫기 없으며, 실수도 잦고 작업 속도도 굼뜬 그는 엘리트로 인정받는 성민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러나 공장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건 창우이다.
금방 싫증 내고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편의점 직원으로 들어간 우재나 노무사에게 작업현장의 미비점과 위험성을 고발하고 뛰쳐나온 성민과는 달리, 창우는 인문계에 다니는 동생의 학비, 무리한 전세계약을 감행한 철없는 어머니와 같은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등에 짊어진 짐은 부담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을 단련하고 성장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회사 출근부와 장례식장 부의봉투 등 창우가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 장면이 반복될 때마다 필체가 뚜렷해지는 디테일에서 드러나듯 ‘3학년 2학기’는 한 노동자 청년의 성장기이다. 취미 삼아 기타로 치는 곡이 헨델의 ‘울게 하소서’인 데서 나타나듯, 그는 힘들고 고된 삶의 비애를 속으로 삼키면서 묵묵히 가족을 부양하는, 평범하지만 어엿이 제 몫을 감당하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것이다.
2025년 한국영화의 빛나는 성취 중 한 편. 극장문화 절멸이라는 재난 상황을 마주하고도 블록버스터의 한 철 장사로 연명하기만 하려는 산업의 관성 때문에 이 가치 있는 영화가 극장에서 퇴출된 채 소규모 공동체 상영을 전전하며 관객을 만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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