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새 부쩍 추워진 날씨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계절의 변화는 늘 우리의 삶을 멈춰 돌아보게 한다. 오늘날의 빠르고 분주한 일상과 달리, 조선시대 사람들은 마을 공동체 속에서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흐름에 맞춰 삶의 질서를 지켜나갔다.
 |
| ‘농가월령도 12폭 병풍’ 제8폭 ‘추수 마친 농가의 가을 풍경’. 부산박물관 제공 |
부산박물관 소장 ‘농가월령도 12폭 병풍’은 그러한 조선의 생활상을 생생히 전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병풍에는 한 해 열두 달의 농촌 풍경이 계절에 따라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초봄에는 밭을 고르고 쟁기질하며 농사를 시작한다. 두 번째 폭에는 아이를 업은 여인까지 일손을 돕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다섯 번째 폭에는 모내기하는 모습이 펼쳐지고, 어린아이와 강아지를 데리고 새참을 가져가는 부인들의 모습이 정겹다. 여름에는 김매기 하던 농부가 웃옷을 벗고 잠시 쉬고 있으며, 가을에는 풍년의 기쁨이 마을에 가득하다. 겨울에는 가족이 둘러앉아 한 해를 마무리하는 모습이 포근하게 그려져 있다.
병풍 상단에 적힌 월령가는 주문자인 박주연이 직접 지은 것으로, 글과 그림이 어우러지며 당시 농민들의 생활과 감정, 계절의 정취를 함께 전한다. 이 병풍은 조선 후기 동래부 향리 박주연이 주문하고 같은 지역 화가 이시눌이 그린 작품으로, 주문자와 화가 모두 부산 출신임이 확인되는 유일한 농가월령도이다. 이시눌은 19세기 초·중반 동래부에서 일본 수출용 회화를 다수 제작한 지역 화가로, 중앙 화단에 견줄 만큼 뛰어난 기량을 갖추었다. 병풍 속 인물 표현과 다양한 농사 장면은 김홍도의 풍속화 양식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더한 이시눌의 역량을 잘 보여준다.
박주연(1813~1872)은 동래부에서 활동한 향리 출신의 한학자로, 스스로 죽림거사(竹林居士)·병산거사(屛山居士)라고 칭하며 학문과 예술을 즐긴 인물이다. 그는 동래부 장군청 천총과 별군관청 행수 등을 역임하며 향촌 사회를 주도했고, 월령가를 통해 자연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농부의 삶과 정서를 섬세하게 노래했다.
“동쪽 울타리에 국화는 누렇고, 옛 언덕에 단풍이 붉다.”
시 속의 구절처럼, 200여 년 전 부산 농가의 풍경은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가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농가월령도 12폭 병풍’은 계절의 감각과 공동체의 따뜻한 정서를 다시 일깨워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자연과 더불어 산 조선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바쁜 일상 속 잠시 쉼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