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생전 가상나라 ‘율려국’ 차용
- 지나친 상업성 사라지는 다양성
- 신선한 플롯으로 신랄하게 비판
- 난감한 현실에 희망도 슬쩍 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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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소설가 소판돈의 낙서견문록’에 나오는 가상의 나라 율려국 지도.
스토리코스모스 제공 |
대한민국 이야기꾼의 계보를 잇는 소설가 김종광(사진)이 장편소설 ‘소설가 소판돈의 독서견문록’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나, 소설가 소판돈은 율려국 낙서공항에 도착했다”는 이 소설 첫 문장을 읽었을 때 ‘걸어서 세상 속으로’나 ‘세계테마기행’ 분위기가 어느 정도는 깔린 견문록 스타일 좌충우돌 장편소설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가 쓴 장편소설 ‘율려낙원국’ ‘조선통신사’ ‘야살쟁이록’ 같은 작품에서 맛본 느낌도 함께 따라왔다.
근데 ‘소설가 소판돈의 낙서견문록’을 읽다 보니 견문록은 견문록인데 좀 다른 방향으로 갔다. 몇몇 대목에서 ‘허걱! 이게 뭐지? 이래 막 가도 되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얼개는 이렇다. 주인공 소판돈은 한국의 별로 안유명한 소설가다. 어느 날 잡지 ‘신기방기’에서 장당 무려 5만 원에 100매짜리 원고청탁을 받는다. “율려국에 가서 ‘낙서인 서열 국민투표’ 르포를 써달라는 내용이다. (가상의 나라인) 율려국은 1771년 조선 선비 허생(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오는 바로 그 허생)이 조선의 천민을 이끌고 동중국해로 나아가 세운 섬나라이다.
조선 사람이 조상인 나라이기에 한국의 영향이 아주 강하고 언어도 한국어와 비슷하다. 율려국 국민은 문학을 좋아해도 너무 심하게 좋아하는 게 장점이자 탈인데, 율려국에서 문학을 뜻하는 낱말이 바로 ‘낙서’다. 즐거울 락(樂)에 글 서(書)를 쓰니 한국에서 말하는, 마구잡이로 쓰거나 그린 엉터리 글·그림을 뜻하는 낙서(落書)와는 아예 다르다.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율려국은 성(性) 관련 산업이 발달해도 너무 발달해 나라 자체가 성을 사고파는 산업에 아예 통으로 의존하며 연명한다. 낙서(그러니까 문학)와 성 산업이 기묘하게 공존하면서 둘 다 어마어마하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율려국에 ‘낙서인 서열 국민투표’를 취재하러 간 소판돈. 그는 어리벙벙하면서도 진지하고, 문학에 관한 뚜렷한 주관이 있으면서도 폭력이나 가난 앞에서라면 언제든 그 뚜렷한 주관을 버릴 수 있는, 성격은 괜찮은데 좀 비열한 작가인데 어쨌든 나름대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쓰느라고 쓴다.
그런데 분명히 율려국 현실을 보고 쓴 글인데도 독자가 그 내용을 읽으면 주로 한국 문단, 한국 사회에 대한 독한 풍자임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한국 문단의 정치와 현실, 지나친 상업성과 사라지는 다양성, 문학상·문학잡지·문학비평의 어두운 면을 율려국을 풍자하는 방법으로 마구 드러낸다. 읽기에 따라 율려국을 빗대 성 관련 산업이 크게 발달한 다른 나라들이나 독재국가를 까면서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런 비판 내용이 독자 뇌리에 쏙쏙 박히느냐?
그렇지 않은 독자도 꽤 있을 것이다. 작가가 이야기 전개에서 독자에게 익숙한 서사의 흐름 같은 걸 잘 안 지키고 여러 이야기를 툭툭 던지는 듯하니 맥락이 출렁출렁하는 면이 있다. ‘주인공의 고난-위기-극복-성장으로 이어지는 서사’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다음 단계로 이동’은 덜 느껴진다. 다만, 마지막 책장을 덮자 비로소 웃기지만 마냥 웃을 수만도 없는, 난감한 한국 문학과 사회 현실이 뇌리에 선명해졌다. 작가는 말미에 소판돈과 율려국 여성 작가 슬픈사슴 사이에 싹튼 사랑 감정도 슬쩍 넣어 희망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