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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뉴욕이 나림에게 안긴 문명적 충격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37> 나림의 뉴욕 이야기 ① ‘제4막’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5-08-17 18:07:55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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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고국선 상상못할 자유·민주
- 71년 처음 찾은 뉴욕에 압도당해
- 브로드웨이 독특한 바 ‘제4막’서
- 에스토니아 화가와 우연한 만남
- 30년 뒤 찾아가봤지만 흔적 없어

2025년 현재 아메리칸 드림은 없다. 아메리카는 여전히 풍요롭고 기회가 많은 나라이긴 하지만 글로벌 리더십을 잃었다. 최강의 군사력과 압도적 경제 지배력을 유지하지만 더는 동경의 대상도 아니고 ‘스탠더드’도 아니다. 아메리카가 드림이었던 이유는 자유로움과 포용성 덕분인데, 그 덕목이 약해지거나 사라지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져도 그렇지 1등이 저 먼저 살겠다고 각자도생을 앞장서 외는 경우가 어디 있나 싶다. 미국은 디그너티(Dignity)를 상실했다.

아메리칸 드림의 시절이 있었다. 풍요롭고 기회가 무진장으로 열려 있는 세상 미국을 동경하던 때가 있었다. 1960-70년대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억압으로 갑갑하던 한국엔 풍요와 자유의 상징 아메리카를 향한 드림이 있었다. 작은 횡재라도 하면 “미국 놈 지갑 주웠다”며 농을 했다. 미국 영주권 그린카드를 받기 위해 위장결혼을 하는 사례도 상당했고, 재미교포 하면 으레 부유해 보이고 세련된 신사 숙녀를 상상했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버클리대의 자유로운 캠퍼스에서 양사(良師)를 만나 양껏 배우고 토론하기를 희망했다.

미국은 경제 군사 문화 학문 등 매사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매력 있었다.

■당혹

2015년 촬영한 뉴욕 도심 풍경이다. 강력한 매력과 우울, 인간미와 고독감이 교차하는 1970년대 뉴욕 이미지는 여전히 느껴진다.
나림 이병주도 1971년 첫 뉴욕 방문에서 압도당했다. 나림에게 뉴욕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사건’이란 얼떨결에 맞은 큰 충격이란 뜻이다. 기존 것과 다른 새로움이 선뜻 코앞에 다가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림의 뉴욕 첫 느낌은 매그너티즘(Magnetism: 자석처럼 강하게 끌어들이는 매력. 자성·자력)이었으나, 다소 우울하기도 했다. 한국과 너무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그 낯설고 새로운 상황과 공간이 나림에게 창작 상상력을 제공했다.

첫 방문 이후 나림은 10여 차례 뉴욕을 찾았고, 생애 마지막 1년 반을 지냈다. 뉴욕에서 제5공화국을 소재로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작품이 ‘행복어 사전’처럼 1980년대 풍물지이었을지 아니면 ‘그해 5월’처럼 다큐멘터리였을지 궁금하지만, 아무런 단서가 없다. 나림은 속기사 면접도 하고 건강도 체크할 겸 귀국한다. 서울에 도착해 검진해 보니 폐암이었다. 나림은 미국 담배 윈스턴을 즐긴 헤비 스모커였다. 나림의 발병이 뉴욕 생활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나림은 뉴욕 소재로 몇 편 작품을 만들려고 했다. ‘제4막’이 첫 번째 작품이고, ‘허드슨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가 두 번째 소설이다. ‘미완의 극’의 미스터리 인물 유한일과 뉴욕에서 독특한 술자리를 하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그 소설은 뉴욕이 주 무대는 아니다.

단편 ‘제4막’은 나림의 1973년 여름 두 번째 뉴욕 여행담이다. 마침 워터게이트 사건이 한창이던 시절이다. 케네디 공항에서 숙소 코모도 호텔로 가는 동안 나림은 택시에서 이 사건에 관한 상원 청문회 중계를 듣는다. 청문회에서는 물론이고 택시기사마저 현직 대통령 닉슨을 비판·비난하는 대목은 유신체제 국가 모독죄가 엄존하는 나라에서 온 작가를 당혹하게 했다.

■우연/인연

뉴욕 맨해튼 거리 벽화로,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Melting Pot) 뉴욕 특성을 잘 보여준다. 나림연구회 박원호 회원 (시인·기술사) 제공
우연은 기이한 것이지만 나림은 즐겨 우연을 인연으로 만든다. 우선 나림이 우연히 정한 숙소 코모도 호텔이 닉슨의 성공과 관련이 있다. 인상이 다소 음침한 무명 하원의원 닉슨이 30대에 일약 상원의원을 거쳐 부통령이란 이례적인 출세 코스를 밟게 된 계기가 코모도 호텔에서의 사문(査問: 심문) 덕분이다. 닉슨은 국무부 거물 앨저 히스를 전 공산당 당원 휘태커 챔버스와 대질해 유죄를 받게 한다.

나림은 그 호텔에서 닉슨의 영욕과 25년 전 사건을 겹쳐보며 서둘러 책방을 찾아 나선다. 초판 이래 거의 절판된 히스의 저서 ‘여론의 법정에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속이려고 하고 속지 않으려고 하는데 게임의 본질이 있다”는 해설이 붙은 워터게이트 게임 상자도 진열되어 있다. 인생이 이렇게 풀리기도 하고 이렇게 꼬이기도 한다. 나림은 호텔로 돌아와 책을 읽고 전화번호부를 들춰 히스에게 전화를 건다. 작가의 호기심은 독자에겐 선물이다. 오지랖은 좌우간 삶의 다채로움을 만들어준다.

코모도 호텔은 1975년 재건축한다. 그 프로젝트를 청년 부동산업자 도널드 트럼프가 맡았다. 협상의 달인으로 승승장구하는 출발점이다. 낡은 호텔을 재개발하며 트럼프는 뉴욕시와 협상해 40년 동안 재산세 50% 감면 혜택을 받았다. 시와 의회를 설득하여 도시의 시그니처 호텔을 짓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트럼프는 강렬한 이미지를 구축한다. 코모도 호텔은 두 대통령의 산실이 된 셈이다.

다음 날 나림은 미술관을 향하던 길에 “남색(男色)은 자랑이다” “우리를 따르면 인구 과잉의 걱정이 없다”는 플래카드를 든 행진 대열을 따라간다. 레즈비언 밴드가 게이 피플 데모를 위해 행진곡을 연주하는 현장에서 “풍기로 말하면 브로드웨이 영화관에 포르노가 범람하고 있는 판이고, 도덕으로 말하면 워싱턴 한복판에서 워터게이트의 음모가 있는 세상인데, 저들이 누굴 해칩니까?”라는 중년 신사의 감상을 듣는다. 미술관에서 엉뚱하게 샛길로 빠졌다 돌아오는 길에 ‘제4막’을 발견한다. 브로드웨이 한가운데 ‘ACT4’ 라는 다소곳한 간판이 붙어 있어 선뜻 들어섰다.

손님이 꽉 찬 공간에서 서성이는데 청년 하나가 일어나 나가며 자리를 내준다. 옆자리의 인상 좋은 청년이 상호 ‘ACT4’를 해설해 준다. “뮤지컬을 빼곤 브로드웨이 연극은 대강 3막이다. 3막까진 극장에서 하고 제4막은 여기서 시작한다는 뜻이다. 3막까지의 무대엔 배우가 등장하지만 4막 무대의 주역은 조명 도구 효과 등 무대 뒤를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조명 조수 아르바이트를 하는 컬럼비아 대학생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함께 기분 좋게 취했다. 이후 매일 밤 찾는 단골이 되었다.

■버번!

어느 비 오는 밤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고 ‘제4막’에 들러 망가진 탱고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초로의 백인 남자가 털썩 앞자리에 앉더니 “버번!”이라 외치고는 일방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한다. 버번을 주문해 잔을 채워주며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말을 계속하여, 어이없어하다 나림도 한국어로 대꾸한다. 말은 하되 서로 통하지도 않는 대화를 한동안 하다가 나림은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너와 나는 제4막이란 술집 이름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지금 닉슨의 운명도 제4막의 고비에 이른 듯하고, 동성연애 찬양 데모하는 미국도 제4막 단계에 들어섰다”고 했다. 희한하게 상대는 그 말을 다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엔 길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내용은 모르지만 처음과는 달리 그의 호소를 이해할 듯했다. 그렇게 서로의 잔을 채워주며 새벽 세 시까지 터무니없는 대화를 계속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도 못 할 정도로 취해 오후 세 시쯤에야 잠을 깼다. 불현듯 ‘워싱턴 스퀘어, 개선문 앞, 오후 다섯 시’에 간밤의 남자를 만나기로 했다는 생각이 났다. 진한 숙취에도 그 관념만은 아주 선명했다. 버번 말고는 영어 한마디 못 하는 그와 과연 어떻게 약속했는지 의아했지만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반백 장발에 베레모를 쓴 사나이가 밝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행한 부인에게 물었더니 “말로 아닌 마음으로” 약속했다고 통역한다. 상실감이란 공감에 진심이 서로 통한 것이다.

에스토니아 망명 화가 세르기 프라토 집에 초대받아 신운(神韻)의 기품을 지닌 그림을 감상하고 핀란드 요릿집에서 대접받는다. 고향으로 돌아갈 꿈에 에스토니아 풍경만 그리고 에스토니아 말만 하는 순수 에스토니아인 프라토는 1년에 한 번 나들이하는데 마침 어제 그 기이한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나림은 삼 년 뒤 ‘제4막’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제4막’, 중의적(重義的)이다. 나림이 느낀 뉴욕도 제4막이고, 망명 인사를 만난 망명객 정서도 제4막이며, 나림의 문명적 시선도 제4막이다. 나림이 다녀간 30년 후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혹시나 하고 찾았지만 나는 ‘ACT4’를 발견하지 못했다. 제4막은 아무에게나 오는 건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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