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나림이 보고 자란 출중한 어른들, ‘지리산’에 영감을 주다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27> ‘지리산’① 이병주 인생 열차의 기점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5-03-30 19:14:13
  •  |   본지 16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 열정적·지적이고 때로 체념적인
- 대하소설 ‘지리산’ 등장 인물들
- 주위 인물을 극화한 사례 많아

- 이념과 현실의 모순을 상징하는
- 스페인 내전에 깊이 몰입한 나림
- ‘이상주의의 좌절’ 소설에 담아내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괄호로 묶인 삽화처럼 뚜렷한 회상이 있다. 나림 이병주의 그 회상은 지리산에서 시작한다. 지리산에 처음 오른 열 살 때 기억이 강렬하다. 어린 나림이 지리산에서 느낀 산의 느낌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산의 푸근함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뿌리였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본 풍경. 작가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이 발효된 현장이기도 하다. 국제신문 DB
산은 살아있다. 산에 봄이 오면 봄의 산이 아닌 봄 그 자체가 된다. 계절이 산을 스쳐 가는 게 아니라 산이 그 의지와 정열로 계절을 만들어 낸다. 여름 가을 겨울 모두 그렇다. 그 산에 조부의 무덤이 있다. 문집 20권을 남긴 문사(文士)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문인 유전자를 전수했다. 할머니 방에 있던 병풍 그림의 신선처럼 할아버지도 신선이 되어 산에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조카 일행을 향도한 중부(仲父)는 성묘를 마치고 지리산에 은거 중인 동지를 만난다. 영민한 나림은 그 장면을 마음에 둔다.

■‘대기만성’ 뜻풀이

경남 하동군 이병주문학관 서가에 꽂힌 ‘이병주 실록 대하소설 지리산’. 국제신문 DB
나림의 지리산에 대한 호의와 애착에 의분(義憤)이 더해진다. 그 의분은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와 연결돼 있다. 하준수와 박범수다. 소설 ‘지리산’은 그 친구들을 위한 만사다. 소설에선 하준규와 박태영으로 나오고, 나림은 이규와 김경주 두 분신으로 등장한다.

장편소설 ‘지리산’ 앞부분은 주로 이규와 박태영의 학창 시절 이야기다. 이규는 하동에서 진주로 왔고 박태영은 함양에서 진주로 나왔다. 지리산을 연한 이웃이다. 장차 한 사람은 학자가 되고 한 사람은 투사가 된다. 한 사람은 온순하고 유연한 수재이고 한 사람은 과격하고 편협한 천재다. 그들의 성장 과정에 어른스러운 어른들이 등장한다. 같은 지우(知遇)를 얻어도 한 사람은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보답하려는 마음 간절하다. 다른 한 사람은 그럴 만하다고 자부하며 다소 삐딱하게 받아들인다.

그 대목에서 이 둘을 진정 아끼는 어른이 이런 말을 한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은 “큰 그릇은 더디 된다”는 뜻이라기보다 “큰 그릇은 늦게까지 계속 성장하여 끝내 대성한다”는 뜻이다. 수재든 천재든 그 재능이 보람을 얻으려면 대재가 되어야만 한다. 난세에 청년을 아끼고 조심스레 길을 열어주는 어른의 태도에 머리 숙여지는 대목이다. 실명 하영진, ‘지리산’에선 하영근으로 등장하는 어른이다.

■나림 곁의 어른들

‘지리산’엔 일제 말 참으로 어려운 시기임에도 어른들의 청년 세대에 대한 뭉근한 사랑과 조심스러운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나림이 특히 어른들의 굄을 받은 이유는 “총명하지만 모나지 않고 순한 성격이면서도 호오 감정이 뚜렷하며 호학하기” 때문이고, “귀(貴)와 복(福) 총명 건강이 두루 조화로운 얼굴” 덕분이다. 나림 인생 열차의 출발점에서 만난 행운이고 큰 자산이다.

나림이 항일과 독립이란 개념을 익힌 것은 작은 아버지 이홍식을 통해서다. 소설에선 이홍설로 등장하며, 지리산 보광당의 원로 그룹으로 괘관산에 모인 청년들에게 독립불기(獨立不羈·남에게 휘둘리거나 속박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함) 정신을 모범으로 보인다. 원로 그룹엔 최남선 이광수보다 먼저 문학운동을 하다 세상 등지고 산에서 약초꾼으로 사는 성한주, 공산당 활동으로 수감 중 병보석을 틈타 산으로 온 이현상, 사상의 불모성을 절절하게 체험한 허무주의자 권창혁 등이 있다. 권창혁과 이현상이 공산주의를 두고 벌이는 토론이 소설의 백미다. 나림의 중부는 독립운동을 한 공이 있음에도 해방정국에서 벼슬을 사양하는 인물이고, 복잡다단한 정국을 정확하게 통찰하는 어른이다. 나림이 중부의 고뇌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 곧 성인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나림은 평생 호학하고 다독하며, 교사를 귀하게 여겼다. 중학교 교장 하라다와 영어 교사 구사마는 나림에게 양사(良師)였다. 하라다 교장은 일본 군국주의가 학교에는 최대한 덜 영향을 끼치도록 온몸으로 막은 교육자다. 교육 당국과도 다투고 경찰과도 맞서며 기개 있게 학생을 보호한다. 결국 권고사직 당하는데, 퇴임 조례 때 전교생이 울며 말린다. 나중에 만주에 중학교를 세운 동포들이 교장으로 모시고 간다.

구사마 선생은 ‘품행 제로’의 엉망 교사이지만 조선어 과목이 폐과되는 날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가르치며 조국과 모국어의 의미를 강의한다. ‘마지막 수업’은 나림이 외운 첫 영어 소설이고, 문학에 개안(開眼)하고 세계에 개안하는 계기가 된다. 사실 나림은 일본인 교사의 횡포에 폭력으로 대응하다 퇴학당했다. 하지만 하라다와 구사마에 대한 호의에서 보듯 편견 없이 사람을 대했다.

이 대목은 루쉰이 온 중국에 배일 반일 정서가 팽배하던 시절, 일본 유학 때 호의를 보여준 은사를 그리워하며 쓴 ‘후지노 선생’이란 소품을 연상케 한다. 나림은 에세이스트 루쉰을 사숙했고, 루쉰이 스승 후지노 교수를 기억하며 글 쓴 용기를 상찬했다.

10대 나림에게 학문에의 지향을 훈도한 어른은 하영근이다. 하영근은 지성과 고집, 그리고 장자(長者)의 풍모를 지닌 거부(巨富)다. 그는 동서양 희귀본을 포함해 수만 권 책을 보유한 장서가(藏書家)이고 꼼꼼하게 그 책을 읽어낸 다독가이다. 하영근은 스스로 딜레당트라고 비하하지만, 인정과 세사에 두루 통한 재야의 절대 고수다. 딜레당트가 뭐냐는 질문에 “눈만 높고 능력이 따라가지 못하는 얼간이, 도락(道樂)으로 학문 예술 언저리를 빙빙 도는 사람, 생산성 없는 지식의 소유자”라고 답하지만, 다분히 겸손이다. 세계 중심에 있다는 자부와 대성이 좌절된 소외자의 체념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다. 나림의 여러 작품에 딜레당트를 자처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세우지 않은 비명’ ‘그해 5월’ ‘망명의 늪’ 등의 성유정이 바로 그런 인물로, 나림의 분신이다.

■스페인 내전 그리고 ‘지리산’

나림은 하영근의 서재에서 스페인 내전에 대한 자료를 보고 비상한 관심을 가진다. 중학생 시기부터 하영근을 통해 스페인 내전의 전개와 여파를 숙지한 나림은 그 인연으로 4·19 직후 다짜고짜 국제신보 편집국장실에 나타난 영국 기자 프레데릭 조스와 금세 친구가 된다. 헤밍웨이와 함께 그 내전에 참전한 조스가 프랑코 군에게 잡혀 정신착란을 일으킬 정도도 심한 고문을 겪었다는 경험담에서 6·25 전란 고비 고비마다 극심한 고통을 겪은 나림이 동병상련을 느낀 것이다. 나림은 1971년 첫 유럽 여행 때 스페인부터 간다.

이후 두 번 더 방문하여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쓴다. 나림이 스페인 내전 연구에 그토록 몰입한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그 내전은 승자가 아니라 패자의 이야기가 더욱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은 세계 지식인의 전쟁이었다. 조지 오웰, 빌리 브란트, 앙드레 말로, 파블로 네루다 등 숱한 지식인이 참전했다. 결과는 알베르 카뮈의 이 말처럼 씁쓸했다. “우리 세대는 가슴 속에 스페인을 간직하고 있다. 옳은데도 패할 수 있고, 무력이 정신을 이길 수 있으며, 용기가 보상받지 못하는 시대가 있다는 사실을 체득한 곳이 바로 내전의 스페인이다.” 힘껏 일을 하다가 좌절한 인물을 애틋하게 여기는 나림에겐 그 내전에서 처절하게 몰락한 아나키스트 집단이 ‘지리산 보광당’의 하준규 박태영의 좌절과 오버랩하는 것이다. 다음, 스페인 내전은 이념 불모성의 상징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 전쟁은 20세기를 풍미한 온갖 이념이 격전을 치른 공간이었다. “이념과 현실의 모순을 보여주는, 이념이 철드는 실험장”이었고, 이상주의의 좌절 현장이었다. 나림이 즐겨하는 표현, 바로 허망과 진실의 공간이었다.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는 자유와 평등을 진정으로 실천하려는 양심가와 자유 평등을 그저 레토릭으로만 외는 야심가의 내부 분열을 명징하게 그리는 스페인 내전 애가(哀歌)다.

‘지리산’에서 나림의 친구 박태영은 그 내전에서 재판 없이 처형된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를 외운다. “어디에서 죽고 싶으냐 물으면 별이 빛나는 밤에 카탈루냐에서 죽고 싶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유언이 없냐 물으면 나의 무덤에 꽃 심지 말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다.” 지리산 마지막 빨치산 박태영의 최후를 묘사하는 데 이보다 더 절절한 시구는 없다.

※특별후원 : BNK금융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충북 11.9% vs 부산 2.3%…반도체가 가른 경제성장률(종합)
  2. 2워터펌프 쏴도 안 나가는 부캉이
  3. 3위용 드러낸 기장촬영소…부산 대작영화 길 열렸다
  4. 44시간 쫓고 쫓긴 ‘부캉이 퇴거’ 작전…주말 그물로 재시도(종합)
  5. 5서울대 경영동아리 출신 카르텔, 미공개 정보로 200억 부당이득
  6. 6첫 공소청 인사…부산광역청장에 이종혁 고검장
  7. 7“통합 논의 항만公 정부 지분, 지자체로 넘겨야”
  8. 8새 광역단체장 재산 1위 김상욱 50억…전재수 6억(종합)
  9. 9영도구 문화도시 사업, 간부간 소송다툼도 확인
  10. 10부산서 키운 대서양연어 첫 출하…“수입산 대체”
  1. 1“통합 논의 항만公 정부 지분, 지자체로 넘겨야”
  2. 2새 광역단체장 재산 1위 김상욱 50억…전재수 6억(종합)
  3. 3北지뢰 1발 추가 발견…대북 방송 재개 등 상응조치 촉각(종합)
  4. 4예상보다 무뎠던 검증 칼날…TP원장 후보 기술고도화 초점
  5. 5‘핵잠수함 특별법’ 국무회의 통과(종합)
  6. 6與 “미래기금으로 지방정부 지원 축소될 일 없어”
  7. 7김도읍 "청와대 가덕도신공항 공사비 증액 '선 계약, 후 특별법 반영'으로 결론
  8. 8“BPA, 1년간 1조원대 채권 발행…항만공사 통폐합 강행 땐 빚 전가”
  9. 9靑 “北포로 비공개 합의 부인 강력 유감” 우크라에 사과 요구(종합)
  10. 10“피지컬AI 항만 실증사업, 광양항 아닌 부산항서 해야”
  1. 1충북 11.9% vs 부산 2.3%…반도체가 가른 경제성장률(종합)
  2. 2서울대 경영동아리 출신 카르텔, 미공개 정보로 200억 부당이득
  3. 3亞·유럽게임 대거 참가…지스타 판 커진다
  4. 4삼정기업·삼정이앤시 회생계획 법원 인가…정상화 첫발(종합)
  5. 5도토리 숲 언덕서 ‘휴식 한 모금’…바리스타과 겸임교수 깊은 손맛
  6. 6주가지수- 2026년 9월 29일
  7. 7해양·AI 중심 ‘플라이아시아’ 내달 개최
  8. 8“기장에 양성자 치료센터 짓자…우주산업 활용도 가능”
  9. 9[한 손 뉴스] 수과원, 스마트폰서 AI가 고등어 어장상황 예측 서비스
  10. 10파생상품·해양금융 미래, 부산서 답 찾는다
  1. 14시간 쫓고 쫓긴 ‘부캉이 퇴거’ 작전…주말 그물로 재시도(종합)
  2. 2첫 공소청 인사…부산광역청장에 이종혁 고검장
  3. 3영도구 문화도시 사업, 간부간 소송다툼도 확인
  4. 4부산서 키운 대서양연어 첫 출하…“수입산 대체”
  5. 5檢, 횡령 혐의 사상구 새마을금고 이사장 9개월 만에 ‘늑장 기소’
  6. 6[신통이의 신문 읽기] 친근해진 ‘부캉이’…캐릭터로 그려볼까요
  7. 7혈세 쓴 도시재생 거점시설 2년간 텅텅
  8. 8부산·울산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6명뿐
  9. 9통영 복합해양레저관광도시 조성 순항…도남권역 민자유치 속도전
  10. 10오늘의 날씨- 2026년 9월 30일
  1. 1역시 안세영…AG 2번째 ‘금빛포효’(종합)
  2. 2공격에 쏟아붓다가 골문 열린 모레노호
  3. 3일본 대회운영 왜 이러나…한국 육상 남자 400m 계주, 판정 논란 딛고 동메달 지켰다
  4. 4큰 日날 뻔한 韓야구…日 아마추어 상대로 3-1 설욕전
  5. 5중국에 두 번 진 이민성호, 이번엔 벼른다
  6. 6큰 日낸 女핸드볼…결승서 일본 꺾고 8년 만에 우승
  7. 7수영·탁구·사격 부진…양궁이 ‘금빛 갈증’ 풀어줄까
  8. 8‘세계 최강’ 안세영, 배드민턴 女단식 금메달…아시안게임 첫 2연패
  9. 9한동희 시즌 23호 홈런 '쾅'…롯데, 키움에 4-2 역전승
  10. 10이소희·백하나 배드민턴 女 복식 24년 만에 금빛 스매시
우리은행
미리보는 제31회 BIFF
연상호 ‘실낙원’ 홍상수 ‘눈 둘 데가 없네’ 등 한자리에
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부산의 기사식당
궁리와 시도 [전체보기]
노동 운동부터 계엄까지…예술로 사회문제 비추다
비바람 견뎌낸 그의 회화…마침내 ‘고정관념 감옥’서 해방
김민우의 인서트 [전체보기]
환상이 불러일으킨 파국
정답 없는 가족의 기록
문화레시피 [전체보기]
‘부산 발레’ 낙동강 타고 새 물길 열다
붉은 빛 조명, 배우·합창단의 호연…눈앞에 다가온 부산오페라하우스
박현주의 신간돋보기 [전체보기]
익숙한 물건에 깃든 삶의 온기 外
인간 빈자리 차지한 반려 로봇 外
박현주의 책 이야기 [전체보기]
히말라야 빙하 붕괴로 대참사…더 심각해진 기후 재난
세계유산 ‘한국의 갯벌’ 얼마나 알고 있나요
아침의 갤러리 [전체보기]
박자현-꾸지 않는 꿈
장승택-ayered Painting P60-11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빨래 /심여혜
잡는 법 /김만옥
주말 영화 박스오피스 [전체보기]
추석 연휴 ‘암살자(들)’ 정상…2위 ‘타짜: 벨제붑의 노래’
‘인턴’, ‘오디세이’ 제치고 정상…허진호 감독 ‘암살자(들)’ 예매율 1위
오늘의 운세- [전체보기]
오늘의 운세- 2026년 9월 30일 (음 8월 20일)
오늘의 운세- 2026년 9월 29일 (음 8월 19일)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전체보기]
할아버지·아버지·본인·아들까지 정쟁으로 죽은 김제겸의 글
아침 산안개를 읊은 조선 전기의 문신 월헌 정수강
  • 2026 국제환경에너지산업전
  • 국제골프아카데미
  • 부산국제마라톤
  • 어린이청소년경제아카데미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