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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섬섬이의 등 /박동식

학원 가는 길 만난 작고 귀여운 삼색 고양이 ‘섬섬이’

“등에 무언갈 얹으면 친구 될 수 있어” 할아버지 말씀

뭐든 얹으려 하다 섬섬이를 세게 움켜 쥔 소녀

결국은 미안함에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 박동식
  •  |   입력 : 2024-12-31 18:15:08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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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깰 수 있겠다!

소녀의 손가락이 스마트폰 화면을 탁탁탁 빠르게 두드렸다. 소녀는 온 신경을 집중해 ‘고양이 대작전’ 13 스테이지를 플레이했다. 고개 숙인 소녀가 길가의 전봇대에 점점 가까워졌다. 머리를 찧기 직전, 소녀는 미끄러지듯 전봇대를 피했다. 마치 정수리에도 두 눈이 있는 것 같다. 소녀는 학원을 갈 때면 언제나 스마트폰 게임을 하며 여길 지나갔다. 소녀는 이 길에 ‘학원 가는 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학원 가는 길’을 지날 때면 오늘처럼 고개를 한 번도 들지 않고 지나는 날이 많았다. 다른 일이 없다면 오늘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소녀가 빨간 벽돌의 담장 옆을 지나는 그때였다.

야옹.

소녀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담벼락 위에 앉은 하양, 노랑, 검정의 삼색 고양이. 아기라기엔 의젓하고 어른이라기엔 아직 작았다. 삼색 고양이는 우유 통에 풍덩 뛰어들었다 나와서는 카레 가루 위에서 이리저리 뒹군 듯한 무늬를 가졌다. 가슴에 있는 검정 나비넥타이 모양의 무늬 탓에 도도한 인상도 풍겼다. 소녀는 눈앞의 고양이가 너무 예뻐, 게임오버가 되는 줄도 몰랐다. 소녀는 한참 고양이를 바라봤다. 그러다 성큼 다가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너 너무 예쁘다. 마음에 들어. 이름도 정했어, 섬섬이.”

야옹.

마음대로 이름을 정하는 게 기분이 나빴을까. 섬섬이는 홱 돌아서더니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올라 쌩하니 모습을 감춰버렸다. 소녀는 자신의 마음이 거절된 거 같아 속이 상했다. 동시에 섬섬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몽클 피어올랐다.



소녀는 그날부터 매일 빨간 담장을 찾아가 섬섬이를 만났다.

“난 네가 내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 어떻게 해주면 내 친구가 될래?”

섬섬이는 소녀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지붕 위로 사라졌다. 소녀는 편의점에서 고양이 간식을 사서 빨간 담 아래 놓아봤다. 고양이 장난감도 사서 흔들어봤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럴수록 섬섬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더 불어났다.

어느 밤, 소녀는 어두컴컴한 ‘학원 가는 길’에서 섬섬이를 쫓았다. 아무리 뛰어도 섬섬이를 잡지 못했고 골목은 끝없이 이어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소녀는 번득 꿈에서 깼다. 하품을 하지 않았는데도 소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소녀가 섬섬이를 만나고 열흘이 되었다.

오늘도 소녀는 터덜터덜 빨간 담장으로 갔다. 그런데 소녀의 눈에 놀라운 모습이 보였다. 여기저기 꿰맨 누런 코트를 입은 할아버지가 빨간 담벼락 아래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허벅지 위에 앉은 섬섬이. 소녀는 한달음에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졸린 듯 반쯤 눈을 뜬 할아버지에게 소녀는 물었다.

“얘, 할아버지 거예요?”

“아니, 이 아이는 이 길이 낳고 기른 고양이란다.”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섬섬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할아버지의 두 손이 섬섬이를 감쌌다.

“너구나, 얠 가지고 싶어하는 애가.”

소녀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까 의문이 생겼다. 계속 날 지켜봤던 걸까?

“꼭 이 고양이를 갖고 싶은 거냐? 다른 고양이는 안 되고?”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긴 바꿀 수 있다면 좋아하는 게 아니지. 그래서 이름도 벌써 붙인 거고. 섬섬이.”

“예! 제가 붙인 이름이에요!”

할아버지는 섬섬이를 가만히 옆에 내려놓고는 일어섰다. 섬섬이는 가지런히 앞발을 모으고 얌전히 엎드렸다. 소녀에게 한 걸음 다가서는 할아버지의 몸이 살짝 기우뚱했다. 다리가 아프시구나, 소녀는 생각했다.

“섬섬이는 나랑 아주 친한 고양이야. 난 이 골목의 모든 고양이를 잘 알지.”

소녀는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어른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할아버지도 그런 어른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좋아하지? 나랑 게임 하나 하자. 모레, 해가 지기 전까지 내가 내는 수수께끼를 네가 풀면 섬섬이를 주마.”

소녀의 눈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무슨 수수께끼요?”

“아주 간단한 거란다. 섬섬이 등에 무언가를 얹기만 하면 돼. 이렇게.”

할아버지가 주름살이 가득한 손을 섬섬이의 등에 얹었다. 섬섬이는 기분이 좋은지 골골하는 소리를 냈다.

“뭐든 좋아. 아주 가벼운 거라도.”

할아버지가 머리 위로 뻗은 단풍나무를 향해 후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손바닥 같은 빨간 단풍잎 하나가 떨어지더니 섬섬이의 등에 내려앉았다. 섬섬이는 단풍잎을 등에 얹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할아버지가 단풍잎을 들어 소녀에게 건넸다.

“어렵지 않지? 어때, 해보겠니?”

소녀는 얼른 단풍잎을 받아 들고는 섬섬이의 등에 얹었다.

“됐다!”

소녀가 성공했다고 확신하는 순간, 섬섬이가 몸을 일으켰다. 매끈한 몸통이 목덜미부터 꼬리 근처까지 꿀렁였다. 마치 물결이 치는 것처럼. 단풍잎이 톡 떨어지자, 할아버지가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다른 걸 올려보지 그래?”

소녀는 가방에서 연습장을 꺼냈다. 한 장을 찢어내 섬섬이 등에 올렸다. 꿀렁. 작은 지우개도 올려보았다. 꿀렁. 해가 뒷산으로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소녀는 가방 안에서 온갖 것을 꺼내 섬섬이의 등에 올렸다. 그럴 때마다 섬섬이의 등은 꿀렁거렸다.



다음날, 소녀는 다시 할아버지와 섬섬이 앞에 섰다.

어제 가방 안에서 꺼낸 것은 모두 실패했다. 소녀는 오늘 다른 걸 올려볼 참이다. ‘학원 가는 길’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바닥에 포개 누워있던 노란 은행잎이 바람이 불자 몸을 일으키다가 까르르 구른다. 이제 보니 섬섬이를 만난 빨간 담장의 맞은편 집 마당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서 있었다. 소녀는 은행잎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다. 그때, 빨간 꽃잎 하나가 미끄러지듯 발치에 다가왔다. 겨울 동백의 꽃잎이라는 걸 소녀는 몰랐지만 어쨌든 주웠다. 이젠 섬섬이 등에 올릴 차례. 하지만, 은행잎도 꿀렁. 동백 꽃잎도 꿀렁. 소녀는 다시 ‘학원 가는 길’을 뛰어다니며 살폈다. 지붕 끄트머리에서 똑똑 떨어지는 반짝이는 물방울도, 골목길을 힐끔 내려다보며 파란 하늘을 지나가는 하얀 구름도, 까마귀가 급하게 친구를 만나러 가다 흘린 건가 싶은 까만 깃털도. 저건 등에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건 어떨까? 그러다 소녀는 문득 생각했다. 섬섬이는 세 가지 색을 가지고 있는데 ‘학원 가는 길’은 알록달록 더 많은 색을 가지고 있다고.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학원 가는 길’의 풍경 전체가 소녀의 두 눈에 벅차게 뛰어들었다. 마술사가 보자기를 확 걷어 토끼, 비둘기를 짠! 하고 보여주는 마술 같았다. 소녀는 제대로 본 적 없던 길이 참 예쁘다고 느꼈다. 그러자 소녀의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반짝 떠올랐다.

‘알록달록 길’

소녀는 앞으로 ‘학원 가는 길’을 이렇게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야옹.

어른 큰 걸음 정도 떨어져 앉은 섬섬이가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섬섬이는 소녀가 골목길을 다니는 내내 졸졸 따라다녔다. 섬섬이와 가까워진 거 같아 소녀는 기뻤다. 소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 섬섬이 등에 얹을 무언가를 찾을 수 있겠다고.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 할아버지와 섬섬이 앞에 선 소녀의 얼굴은 어두웠다.

어제 소녀는 즐겁게 섬섬이와 ‘알록달록 길’을 다녔다. 하지만 등에 무언가를 얹지는 못했다. 이제 곧 해가 질 텐데…. 소녀는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섬섬아 좋아해’라고 소녀가 쓴 종이. 소녀는 할아버지에게 종이를 들어 보였다. 근데 어쩐 일인지 소녀는 할아버지의 시선을 피했다.

“…제 마음을 담은 종이예요.”

소녀가 종이를 섬섬이의 등에 놓자 딱 얹혔다. 바람이 살짝 불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사실 소녀는 어제 늦은 밤까지 고민했다. 섬섬이의 등에 무얼 얹어야 할까, 어떻게 얹지. 결국 소녀는 마음을 적은 종이에 몰래 풀을 바르기로 했다. 등에 종이를 붙인 섬섬이를 소녀는 미안한 눈으로 보았다. 섬섬이는 몸을 배배 꼬며 종이를 물어 떼어냈다. 할아버지가 두 눈을 잔뜩 찌푸렸다.


“그건 붙이는 거지, 얹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마음은 붙이는 게 아니야.”

소녀는 더 다급해졌다. 소녀의 손이 단번에 섬섬이의 등을 움켜잡았다. 섬섬이가 버둥거릴수록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야옹-.

섬섬이가 길게 울자 소녀는 움찔하며 손을 놓았다. 할아버지가 눈을 치켜떴다.

“그건 잡는 거지.”

성난 할아버지의 얼굴이 불그스레한 노을빛에 물든다. 소녀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뒷산에 해가 살짝 걸쳤다. 소녀는 어쩔 줄 몰라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았다. 맞닿은 손바닥엔 땀이 삐질삐질 났다. 열 발가락은 신발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소녀는 할아버지 옆에 앉은 섬섬이를 내려다보았고 섬섬이는 물방울 같은 눈동자로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야옹.

기운이 없는 섬섬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소녀의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은 금방 볼을 쪼르르 타고 내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해는 점점 더 뒷산 너머로 몸을 숨겼다. ‘알록달록 길’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섬섬이 앞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할아버지가 다가섰다.

“왜 우는 거니? 섬섬이를 못 가져서?”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섬섬이 목소리가 지쳤어요. 제가 괴롭혔어요. 어제처럼 섬섬이가 즐거워야 저도 행복한데….”

뜻밖의 대답에 할아버지는 놀랐다. 섬섬이의 발치에 소녀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이미 해는 완전히 뒷산으로 넘어가 버렸다. 섬섬이가 소녀 앞으로 한걸음 다가왔다. 빤히 소녀를 보던 섬섬이가 갑자기 발랑! 뒤로 누웠다. 고양이가 마음이 편안할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섬섬이는 등을 땅에 댄 채 소녀를 바라봤다. 젖은 구슬 같은 소녀의 눈도 섬섬이를 보았다. 할아버지가 무릎을 치며 웃었다.

“얹었네, 얹었어! 이 골목길, 온 동네를 통째 얹었어! 아니지! 이 지구를 얹었네! 하하하! ”

소녀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가로등 불빛이 켜지며 ‘알록달록 길’이 환해졌다.

“자, 이제 약속대로 섬섬이는 네 고양이야.”

소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가 금방 가라앉았다. 할아버지는 의아했다.

“왜? 싫어?”

할아버지에게 대답하는 대신 소녀는 섬섬이 앞에 다가앉았다.

‘마음은 붙이는 게 아니야.’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뒤부터 소녀의 가슴에 맺히는 미안함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섬섬이에게 마음대로 이름을 붙인 일….

“내 이름은 은섬이야.”

섬섬이라는 이름은 은섬이가 자신의 이름에서 좋아하는 글자를 따와 만든 이름이었다. 마음대로가 아니라, 마음을 담아 은섬이는 손을 내밀었다.

“내 친구가 되어줄래?”

야옹.

섬섬이가 은섬이의 손가락 끝에 볼을 비볐다. 할아버지가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좋다는구나. 섬섬이라고 부르는 것도.”

“정말요?”

은섬이는 정강이에 볼을 비비는 섬섬이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은섬이의 손도, 섬섬이의 등도 편안했다.



은섬이는 섬섬이를 안고 가로등 아래에 섰다. ‘알록달록 길’ 저편에 선 할아버지가 둘에게 손을 흔들었다. 작별 인사를 마치고 걸음을 옮기던 은섬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 우리 기념으로 셀카 찍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서 있던 자리에는 털이 여기저기 빠진 늙은 치즈 고양이 한 마리만 보였다.

야옹-.

굵고 갈라지는 목소리. 치즈 고양이가 뒷다리를 살짝 절뚝이며 걸음을 옮겼다. 담장 아래 그림자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보이지 않았다. 마치 마술사가 보자기를 덮으면 무엇이든 사라지는 마술처럼 치즈 고양이는 모습을 감췄다. 이것도 ‘알록달록 길’의 마술일까. 은섬이는 의아한 얼굴로 섬섬이를 돌아보았다. 은섬이와 섬섬이 위로 사이좋게 손을 잡은 가로등 불빛과 달빛이 사뿐사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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