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조재휘의 시네필] 영화의 종언을 마주하며

클로즈 유어 아이즈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4-11-21 18:34:54
  •  |   본지 13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3)는 우리 시대 또 다른 버전의 ‘시네마 천국’(1988)이다. ‘햇빛 속의 모과나무’(1992) 이래 단편만을 작업하며 은둔해 왔던 과작의 대가 빅토르 에리세가 31년 만에 무거운 몸을 일으키자 ‘벌집의 정령’(1973)의 아역 데뷔 이래 스페인 영화계의 명배우로 성장한 아나 토렌트도 반세기 만에 재회해 일익을 거든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한 장면.
이 복귀작은 ‘벌집의 정령’과 ‘남쪽’(1983) 단 두 작품만으로 각인되었을 인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자연광을 섬세히 다루는 회화적 영상미는 여전하지만, 소녀의 시점에서 본 어른들의 세계, 스페인 내전과 엮인 현대사의 불안한 풍경은 전면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다만 역사에 관한 영화라는 점만큼은 공통된다. 영화감독 겸 소설가인 미겔의 소지품 중에 보이는, 페이지를 넘기면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6)이 재생되는 플립 북은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지닌 고고학적 열정의 작은 증거이다.

TV 프로그램 섭외를 계기로 미겔은 한 시절을 풍미한 명배우이지만 촬영 도중 홀연히 행적을 감춘 친구 훌리오의 진실을 찾아 나선다. 그의 동선을 따라가며 보게 되는 세계에는 낡은 과거의 흔적만이 가득하다. 편집 기사 친구 막스의 집은 필름보관소이고, 훌리오의 딸 아나는 박물관 큐레이터이며, 훌리오와도 잠시 사귀었던 옛 연인은 낡은 피아노를 소중히 여기며 젊은 시절의 노래를 부른다.

매끈한 젊은이의 얼굴 반대편에 덥수룩한 수염의 노인을 배치하는, 야누스를 떠올리게 하는 대리석 흉상의 상징적 이미지는 과거와 현재, 영화 안과 바깥의 현실을 불가분의 관계로 놓는 상호 침투성과 수미쌍관의 구조를 암시한다.

영화 속 영화로 훌리오의 마지막 출연작 ‘작별의 눈빛’을 보여주는 액자식 구성의 도입부. 프랑코의 독재를 피해 망명한 한 남자가 오래전 생이별한 딸을 찾아달라는 유대인 노인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극중극 상황은 훌리오의 기억을 찾는 미겔의 여정과 겹쳐지며, 유일한 단서인 중국 소녀의 사진은 수도원에 몸을 의탁한 노인 가르델이 곧 훌리오 본인임을 입증하는 증거이자 기억을 환기시키는 오브제가 된다.

22년 전의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훌리오에게 일깨우고자 안간힘을 쓰는 미겔의 노력은 폐업한 영화관을 다시 열어 ‘작별의 눈빛’을 상영하는 걸로 귀결된다. 두 통의 필름 릴만 남은 이 영화가 실은 중간 과정의 내용만 없었을 뿐, 대리석 흉상의 양면처럼 도입부와 결말은 완성되어 있었음이 밝혀지고, 오래전 배우였던 자신의 모습이 담긴 필름의 이미지가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순간, 가르델의 눈동자는 글썽일 듯 흔들린다. 그렇게 남겨져있던 필름은 기억의 대응물이 되어 존재를 되새기고 죽어있던 배우의 정체성을 소생시킨다.

필름 자체와 동일시되던 영화의 시대는 기울어가지만, 그 경험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기억은 잃었어도 매듭을 묶는 감각만큼은 간직하고 있던 훌리오의 손길처럼 현대인의 잠재의식 속에 영화는 존재하며, 눈 감고 외면하더라도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섣부른 희망을 말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종언(終焉)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쇠퇴할지언정, 낙담해서 영영 작별을 고해선 안 되는 것이다. 영화는 아직 미완의 가능성이기에. 이 전언(傳言)을 위해 빅토르 에리세는 오랜 침묵을 깨고 돌아온 것이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전재수 “생곡 무산 땐 에코델타에 소각장 불가피”
  2. 2센텀2 분수령 풍산 부지보상 본격화…1조 관측
  3. 3‘부산검찰청’ 떼고 ‘공소청’ 간판
  4. 4한달간 부산은 축제도시…‘페스티벌 시월’ 시작
  5. 5김해공항과 ‘50년 동행’ 부산은행…영업점 단독 응찰
  6. 6“부캉이 왜 쫓아내나”vs“먹이활동 안 해 폐사 우려”
  7. 7“부캉이 테마공원 만들자”…동구는 조형물 설치 검토
  8. 8軍·유엔사 “군사분계선 이남 지뢰매설, 北 정전협정 위반”(종합)
  9. 9부산 1000억 문화펀드 조성…퐁피두·라스칼라는 이달 결론
  10. 10전재수 전 보좌진 4명 ‘증거인멸’ 유죄(종합)
  1. 1전재수 “생곡 무산 땐 에코델타에 소각장 불가피”
  2. 2軍·유엔사 “군사분계선 이남 지뢰매설, 北 정전협정 위반”(종합)
  3. 3국정원 “우크라가 北포로 송환 비공개 먼저 요청”(종합)
  4. 4‘김종서함’ 울산 진수식 찾은 이재명 대통령 “자주국방이 주권”
  5. 5여야 “軍, 북한에 강력 대응” 촉구
  6. 6北지뢰 1발 추가 발견…대북 방송 재개 등 상응조치 촉각(종합)
  7. 7“통합 논의 항만公 정부 지분, 지자체로 넘겨야”
  8. 8새 광역단체장 재산 1위 김상욱 50억…전재수 6억(종합)
  9. 9[속보] 김여정, ‘DMZ 북한 지뢰’ 발표 전면부인…“서울의 자작광대극”
  10. 10예상보다 무뎠던 검증 칼날…TP원장 후보 기술고도화 초점
  1. 1센텀2 분수령 풍산 부지보상 본격화…1조 관측
  2. 2한달간 부산은 축제도시…‘페스티벌 시월’ 시작
  3. 3김해공항과 ‘50년 동행’ 부산은행…영업점 단독 응찰
  4. 4“부캉이 왜 쫓아내나”vs“먹이활동 안 해 폐사 우려”
  5. 5“부캉이 테마공원 만들자”…동구는 조형물 설치 검토
  6. 6센텀2 배후지 ‘트리븐 센텀’ 뜬다
  7. 7HJ중공업 7900TEU급 ‘가닛’ 명명식…중대형 컨선 14척 인도
  8. 8해운 대기업 부산 이전 효과 내려면…“산업 생태계 구축돼야”
  9. 9반도체 호황에…올 국세수입 478조 역대 최대 예측(종합)
  10. 10삼영이엔씨, 회생계획 인가…3자배정 100억 유증
  1. 1‘부산검찰청’ 떼고 ‘공소청’ 간판
  2. 2전재수 전 보좌진 4명 ‘증거인멸’ 유죄(종합)
  3. 3朴시정 선거악재 우려 ‘생곡 용역’ 중단…백지화 소문 키워
  4. 4[한 손 뉴스] 푸바오의 쌍둥이 동생들, 올 연말 중국으로 떠난다(종합)
  5. 5“110억 투입 부산 의료버스, 플랫폼업체에 예산 1/3 지급”
  6. 6오늘의 날씨- 2026년 10월 1일
  7. 7바리케이드 걷힌 소녀상…2년여 만에 시민 품으로(종합)
  8. 84년 방치 창원 짚트랙, 새 체험시설 만든다
  9. 9“비영리법인 설립, 법 기준 세워야”
  10. 10창녕 2세 아들 숨지게 한 父 징역 17년
  1. 1돌아온 금빛 주역들, 프로야구 막판 순위·타이틀 경쟁
  2. 2중원 황인범·투톱 변화…승리 축포 쏠까
  3. 3해볼 만하다…女축구, 8년 만의 AG 메달 도전
  4. 4역시 안세영…AG 2번째 ‘금빛포효’(종합)
  5. 5아시안게임 남자축구, 중국에 역전승 거두고 결승 진출
  6. 6공격에 쏟아붓다가 골문 열린 모레노호
  7. 7일본 대회운영 왜 이러나…한국 육상 남자 400m 계주, 판정 논란 딛고 동메달 지켰다
  8. 89회 4실점 진땀…롯데, 키움에 가까스로 승리
  9. 9고성군, 통영시 거제시와 손잡고 2029년 도민체전 공동개최
  10. 10한동희 시즌 23호 홈런 '쾅'…롯데, 키움에 4-2 역전승
우리은행
미리보는 제31회 BIFF
日 70년史부터 ‘올나잇’ 상영회까지…애니 세계로 초대
미리보는 제31회 BIFF
연상호 ‘실낙원’ 홍상수 ‘눈 둘 데가 없네’ 등 한자리에
궁리와 시도 [전체보기]
노동 운동부터 계엄까지…예술로 사회문제 비추다
비바람 견뎌낸 그의 회화…마침내 ‘고정관념 감옥’서 해방
김민우의 인서트 [전체보기]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의 가능한 사랑
환상이 불러일으킨 파국
문화레시피 [전체보기]
‘부산 발레’ 낙동강 타고 새 물길 열다
붉은 빛 조명, 배우·합창단의 호연…눈앞에 다가온 부산오페라하우스
박현주의 신간돋보기 [전체보기]
익숙한 물건에 깃든 삶의 온기 外
인간 빈자리 차지한 반려 로봇 外
박현주의 책 이야기 [전체보기]
히말라야 빙하 붕괴로 대참사…더 심각해진 기후 재난
세계유산 ‘한국의 갯벌’ 얼마나 알고 있나요
아침의 갤러리 [전체보기]
박자현-꾸지 않는 꿈
장승택-ayered Painting P60-11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기다림의 미학 /윤종순
빨래 /심여혜
주말 영화 박스오피스 [전체보기]
추석 연휴 ‘암살자(들)’ 정상…2위 ‘타짜: 벨제붑의 노래’
‘인턴’, ‘오디세이’ 제치고 정상…허진호 감독 ‘암살자(들)’ 예매율 1위
오늘의 운세- [전체보기]
오늘의 운세- 2026년 10월 1일 (음 8월 21일)
오늘의 운세- 2026년 9월 30일 (음 8월 20일)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전체보기]
할아버지·아버지·본인·아들까지 정쟁으로 죽은 김제겸의 글
아침 산안개를 읊은 조선 전기의 문신 월헌 정수강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