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은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吾頭可斷 髮不可斷)’
누구나 한번은 들어봤을 이 말은 1896년 전국의 단발령이 반포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한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에서 강조하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에 따라 부모에게서 받은 머리카락을 훼손하지 않고 지키는 것이 효(孝)라고 생각했다. 그 효를 다하기 위해 기른 머리카락은 댕기에 땋아 곱게 길렀고, 성인이 되었다는 관례(冠禮) 의식을 치르고서야 머리를 올렸는데 여자는 비녀를, 남자는 동곳(사진)을 이용해 상투를 틀었다. 이때 상투를 고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동곳으로, 남성에게 동곳은 필수품이었다.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 중 ‘동곳을 빼다’는 복종과 굴욕의 비유적 표현으로, 동곳을 빼 상투가 풀어지는 모양새가 매우 볼품없고 치욕적이라고 생각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식이 담긴 말이다.
이렇듯 조선시대 남성의 체면과 과시를 위한 장식품이기도 했던 동곳은 사회적 신분이나 재력에 따라 금 옥 비취 산호 등으로 화려하게 제작된 것도 있고 백동 주석 나무 뿔을 이용해 만들기도 했다. 모양새는 대부분 반구형으로 끝이 뾰족해 머리카락을 고정하기 유용한 형태다. 임금이나 세자 등 왕실에서 사용한 동곳 중에는 20㎝가 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일반 서민들은 10㎝ 내외의 동곳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장 방곡리 유적에서 출토된 동곳의 길이는 7cm로 재질은 은이다. 구부린 몸체 전면에 음각으로 국화꽃과 줄기가 표현되었다. 동곳의 몸체 대다수는 상투 안에 감춰지기 때문에 장식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은데 방곡리 유적에서 출토된 동곳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 거기다 눈에 띄 지 않는 음각기법으로 섬세한 장식을 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남성의 필수품이자 자존심의 상징이었던 이 동곳은 12월 31일까지 정관박물관 특별기획전 ‘정관박물관 10년의 기록-이제 우리의 일기를 쓰겠소’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