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텍스트 힙(Text hip)’이 젊은 세대의 새로운 유행으로 떠오르고 있다. ‘텍스트 힙’이란‘글자’를 뜻하는 ‘텍스트(text)’와 ‘멋있다·개성 있다‘라는 뜻의 은어인 ‘힙(hip)하다’가 합쳐진 신조어이다. ‘텍스트 힙’은 책이나 책 읽는 모습, 자신의 책장 등을 촬영하여 SNS를 통해 타인과 공유하는 새로운 형태의 독서문화로 나타나고 있다.
방식은 다르지만 조선 시대에도 ‘텍스트 힙’이 존재했다. 바로 책거리(冊巨里, 책가도冊架圖로도 불린다)라 불리던 그림이다. 책거리는 책을 중심으로 문방구 등 여러 가지 사물을 함께 그린 그림인데 병풍 형태로 많이 만들어졌다. 놀랍게도 그 유행을 이끈 선두 주자는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正祖, 제위 1776~1800)였다.
독서를 좋아한 정조는 책 읽을 시간이 없을 때 책거리를 보며 마음으로 즐겼다고 한다. 문(文)을 중시하던 정조의 사랑을 듬뿍 받은 책거리는 궁중을 넘어 상류층으로 번졌다. 영·정조 시기 학자인 이규상(李圭象, 1727~1799)이 지은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는 ‘당시 상류층의 집 벽에 이 그림으로 장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언급하고 있어 그 유행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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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거리 8폭 병풍의 그림을 확대한 모습. |
19세기가 되면 책거리는 궁중과 상류 사대부층뿐만 아니라 민간에까지 확산하면서 민화로 그 저변을 확대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그림 형식에도 변화가 생긴다. 기존 책거리가 책장 안의 책과 문방구를 그려 학문 숭상의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하였다면, 이때부터는 책장이 생략되고 책의 비중이 줄어들거나 사용자의 취향을 반영한 여러 가지 기물이 등장하는 등 자유분방한 구성으로 변화한다.
부산박물관 소장 책거리 8폭 병풍(사진)도 책장 없이 모든 사물이 화면 가운데로 집중되어 복잡하면서도 자유분방한 구도를 이룬다. 그림 속 책은 화려한 비단 책갑을 두르고 있지만 그림의 중앙이나 앞에 위치하지 않고 측면이나 뒤에 그려져 있다. 그리고 책갑 주위에는 잉어 모양 장식품, 안경, 연꽃·모란 등의 꽃과 포도·참외와 같은 과일 등 사용자의 취향과 염원을 담은 물건이 가득하다. 또한, 활과 화살 등 무(武)와 관련된 사물까지 그려져 있다. 그래서 ‘사용자가 무관이었을까? 혹시 무관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을까?’라는 상상을 하게 한다.
책거리 8폭 병풍은 현재 부산박물관 부산관 미술실에 전시되어 있다. 그 앞에 서서 그림을 보고 있자면 오랜 시간을 건너 이 병풍 주인의 취향과 염원, 방의 분위기까지 전해진다. 마치 누군가의 SNS 게시물을 둘러보는 기분이다. 어쩐지 이 그림 앞에서 인증샷을 찍어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