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2024)에서 상덕(최민식)과 영근(유해진)은 쇠말뚝을 찾기 위해 묫자리를 파헤치다가, 나중에 관 속의 오니(鬼) 자체가 지맥을 끊는 말뚝 역할을 했다는 진실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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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극장가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파묘’ 한 장면. |
도시 전설로 판명 난 일제의 쇠말뚝을 모티브로 가져온 것이 단지 항일 기조로 관객의 민족주의에 호소한다는 일차원적 발상의 발로는 아닐 것이다. 연출 관점에서 본 ‘파묘’는 거칠고 성긴 극의 국면 전환, 편의적인 보이스오버로 형식적 세련미를 희생하는 결점을 감추지 못하나, 그럼에도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우리 안에 그어진 채 남겨져 끝내 치유되지 못한 어떤 ‘상처’를 대면하려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망가진 과거의 망령은 산 자의 현재를 옥죈다. 뛰쳐나온 친일파의 망령은 후손마저 해치려 하고, 파헤친 묫자리 더 깊숙한 곳에는 500년 전, 임진왜란에도 참전했을 사무라이의 원령이 봉인돼 있다. 영화에서 인상 깊은 순간은 선 채로 파묻혀 흉물스러운 모양새를 한 관의 수직적 이미지에서 드러난다. 묻힌 채 보이지 않았고, 다들 외면하고 있었지만, 깊숙한 곳에 살아남아 이면에서 실체적 힘을 발휘하는 그것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 응어리진 역사의 상흔(傷痕)에 다름 아니다.
영화를 보는 도중 봉준호의 ‘괴물’(2006)을 떠올렸다. 장재현 감독이 묫자리 밑바닥을 파헤친다면, 봉준호는 한강 수면 아래와 지하수로에 웅크린 채 도사리고 있을 무언가를 응시한다. ‘풍경이 생기면 곧 그 기원은 은폐’(가라타니 고진)되지만 ‘무릇 감추어진 것 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장자)기 마련이다. ‘괴물’과 ‘파묘’는 ‘탈은폐’(aletheia)의 영화다. 두 영화는 깊이감이 부각되는 공간의 수직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며 감춰져 있던 것, 들춰내길 꺼려해 온 무언가를 표면 위로 끌어내 올린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직후 혼란과 전쟁을 거쳐 산업화·민주화 그리고 자본주의 극단화로 치달은 현재까지, 한국 근현대사란 다른 국가가 200여 년 거치며 겪은 과정을 절반 남짓한 시간에 압축한 폭력의 역사다. 현재 우리 세상은 바로 그 폭력의 결과다. 묻히고 잊힌 것이 어디 일제 잔재뿐이겠는가? 미군부대에서 방류한 포름알데히드부터 한강에 투신한 자살자 시신까지, 한국사회가 발화(發話)를 억눌러 감춰온 것은 지하로 흘러들어 괴물을 먹여 키운 자양분이 된다.
오니와 괴물은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폭력의 역사가 잉태한 괴물은 폭력 형태로 돌아와 진실을 폭로한다.
영화가 객관적 진실을 온전히 재현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현실의 정서적 풍경을 드러낼 수는 있다. 그것이 대중의 징후를 겨냥하는 순간 무시무시한 위력의 폭발이 일어난다. ‘서울의 봄’(2023)에 깔린 정념 또한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진, 일그러진 역사의 모순과 응어리를 마주하는 무기력함이라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한국영화는 무수하고 다양한 결의 폭력, 불우함으로 점철된 역사현실의 산물이고, 극장은 거국적 씻김굿의 장이 된다. 언제쯤 한국사회는 해원(解冤)에 이를 수 있을까? 그 이후의 한국영화를 우리는 과연 상상할 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