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임 사진가의 ‘얼굴들-당신이 아는 누군가이거나 당신’ 전시가 ATELIER 3061(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달맞이길 30, 엘시티더몰 3층)에서 9.14~24일간 (open10:30 – close18;00) 열린다.
작가는 가면을 통해 우리 내면의 일렁이는 욕망과 정체성을 담담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미세한 근육들이 수없이 많은 신호를 보내는 얼굴과 달리 가면은 단순하다. 하나의 얼굴이다. 그런데 단순한 얼굴인 가면을 쓴 사람은 여전히 모호하고 어렴풋하다. 이 작업은 가려진 얼굴에 대한 이야기이고 내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면을 쓴, 혹은 베일로 가린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 아래 깃든 누군가의 얼굴 혹은 나의 얼굴을 보여주고자 한다.’라고 작품 기획 의도를 밝히고 있다. 작가는 전문 모델이 아닌 일반인을 주체로 등장시키면서 작가의 의도된 퍼포먼스를 통해 스토리를 담아내기에 관람자는 친숙함과 낯섦의 경계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본 전시는 부산문화재단 선정 우수예술지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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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임 사진가의 전시 ‘얼굴들-당신이 아는 누군가이거나 당신’이 9월14일~24일간 ATELIER 3061 갤러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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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강홍구 작가의 전시평이다.
우리말 얼굴은 얼과 골의 합성어라 한다. 얼은 정신이고 골을 꼴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견해는 그것은 그저 속설이며 조선시대까지 오늘의 얼굴은 낯이라는 말이 주로 쓰였다 한다.
그리스 시대 연극배우들은 모두 가면을 썼다. 그 가면은 대사의 증폭, 등장인물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서였고 라틴어로 전성되면서 페르소나 Persona가 되었고 영어의 Person, Personality 어원이다.
가면으로서의 페르소나는 개인의 성격이 되고, 사회적 역할을 위한 가면이 되며, 서사 구조를 가진 작품에 나오는 인물의 특성이 된다. 페르소나는 누구에게나 있고 기이하게도 가면이면서 자신이 된다. 그 가면들을 바꾸려고 성형수술을 하거나, 화장, 분장, 가발 등의 다양한 도구와 방법들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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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임 작 - 노란 장갑을 낀 컵라면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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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는 코비드19 시대에 개인의 신체를 보호하고 타인에게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지만 누구나 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아무도 쓰지 않은 것과 같기도 했다. 마스크는 시대가 제공한 의학적 가면이었고 가면 아래의 얼굴을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마스크는 그걸 써야 한다는 권력에 순응하고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는 징표였다. 나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얼굴의 메커니즘을 ‘흰 벽과 검은 구멍’이라는 두 개의 추상적 요소로 요약했었다. 그들은 이를 ‘안면 성의 추상기계’라 불렀다. 흰 벽은 얼굴의 판이고 검은 구멍은 눈, 코, 입이다. 검은 구멍들은 사회적 권력에 공명하고 그에 반응한다. 즉 정보를 수집하고 내보내는 기호 소통의 장치이자 사회적 입지에 따라 변하는 적절한 얼굴, 표정을 만드는 수단이며 늘 재배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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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임 작 -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하는 나비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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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는 건축, 자동차 등등의 디자인에도 사람의 얼굴과 유사한 ‘흰 벽과 검은 구멍’들로 통용된다. 가면은 이 벽과 구멍을 가려 정보 소통의 상 작용을 단절한다. 가면을 쓴 사람은 정보를 일상적으로 수집하지만 그걸 보는 사람에게 구멍이 내보내는 정보가 없거나 일방적이다.
그래서일까? 미술이나 사진 작품에서 가면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박정임은 그 흔한 소재를 과감하게 이용한다. 대체로 실패해도 좋다는 기분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태도이다. 그것은 좋은 자세이다. 무엇이 두려워 하고싶은 것을 하지 못하겠는가?
몇몇 작품들이 눈에 띈다. 작가는 주요 작품이 아니라 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쟁반을 든 아줌마와, 열무를 든 남자 같은 작품이 묘하게 눈길을 끈다.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얼굴을 가린 사물들이 가지는 즉흥성, 현실감이 의표를 찔러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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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임 작 - 별사탕 장식을 얹은 생크림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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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노란 장갑 컵라면 사나이’의 거의 완벽한 좌우 대칭형 위장- 컵라면에 비해 값비싸 보이는 오토바이와의 기묘한 충돌! 필름 망토를 두른 ‘비디오 키드 전사’의 위장과 아이러니,‘ 수국 아가씨의 변신’, ‘골프공 가면을 쓴 남자’의 색깔 있는 고민들도 흥미있다. 이 재미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러나 역시 나는 개인적으로 ‘핑크 벌룬 프랜드쉽’과 같은 단순한 일상적 사물들이 그냥 얼굴을 가려서 자연/ 부자연스러움이라는 경계에 놓아두는 작품들이 좋다. 그것은 순간적이며, 재치가 보이며 공들여 만든 작업들에 비해 가벼움으로써 작가가 원하는 바를 예리하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니다 나는 작가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이 작품들이 좋다는 것은 내 취향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임은 이 작업들이 작가의 일방통행적 진행이 아니라 모델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어느 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으며 제작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며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 작업은 일종의 프로세스 아트이자 그 결과의 기록이다. 변화의 과정이 드러났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없지 않다. 대부분의 연출 사진 작업들이 결과만 집중해 보여주는 것에 나는 늘 불만이 좀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작업들의 과정을 한번 보고 싶다. 듀안 마이클의 사진들처럼. 즉 가면 뒤의 얼굴이나, 가면의 의미하는 것보다 과정 자체를. 아니다. 어쩌면 이 작업들은 그것을 궁금하게 함으로써 성공했는지도 모르겠다.
얼굴은 가면이 되는 여러 가지 물건들로 가렸지만, 몸과 차림새가 드러나는 사진들이 더 아이러니하다. 가면의 언어와 몸의 언어가 사이의 격차 혹은, 기호적 차이나 갈라섬이 흥미 있었다. 바이올린을 든 인물의 차림새, 자세, 팔뚝, 도라미 가면을 쓴 인물의 목주름 등이 그것이다. 그 육체적 기호들은 모델들의 경력과 나이를 드러내면서 가면들과 정면충돌한다. 보는 즐거움, 읽는 즐거움이 그 사이에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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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임 작 - 커다란 모과나무 아래 부들부들 낚싯대를 든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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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들은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결과가 일치함으로써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어긋남으로써 열린 구조의 작업이 된다. 나는 그 점이 좋다. 작가는 그것을 의식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예술, 사진은 항상 작가의 의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며 결과와 최초의 시도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다. 그리고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 균열에서 생성된다.
물론 균열, 혹은 파열이 너무 크면 작업은 구심점이 사라지고, 너무 작으면 원심력이 무너진다. 아마도 내가 재미있어했던 작업들은 그 힘들의 미묘한 균형이 가져온 것이나 아니었을까?
작가란 작품이라는 가면을 여럿 만들어 쓰는 존재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 가면은 벗어버릴 수가 없다. 마치 중국 변검에 나오는 가면들처럼 자주 바뀌기는 하지만... 박정임의 작업들은 가면이고 작업이라는 가면이 바로 박정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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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임작 - 핑크 발룬 프렌드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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