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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푸른별 지구의 호소 “난 blue(우울)해”…장난스런 낙서에 묵직한 메시지

루마니아 드로잉 작가 퍼잡스키, 부산현대미술관 기후 주제 전시

  • 최승희 기자 shchoi@kookje.co.kr
  •  |   입력 : 2023-09-12 18:39:03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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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 유리 난간·벽면 등에 작업

- 해학적 언어유희로 이슈들 표현
- 단어 의미보단 형태서 영감받아

- “작품 지워진대도 개의치 않아요
- 내 작업은 댄스와 같은 퍼포먼스”

‘I FEEL BLUE(나 우울해)’. 푸른(BLUE) 지구가 우울(BLUE)하다고 호소한다. 지구 위 인간이 ‘WHAT CAN I DO FOR YOU?(뭘 해줄까?)’라고 묻자 ‘LEAVE!(떠나!)’라고 외치기도 한다. 루마니아의 드로잉 작가 댄 퍼잡스키(Dan Perjovschi)가 부산현대미술관(부산 사하구)에 작업한 ‘낙서’ 속 이야기들이다. 최근 미술관 3층까지 이어지는 계단의 유리 난간과 유리 벽면이 그의 드로잉으로 채워졌다. 형태는 단순하지만 던지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엘리베이터보다 두 발로 오르는 계단이 즐거워졌다.
루마니아의 드로잉 작가 댄 퍼잡스키가 부산현대미술관 외벽 유리에 작업한 ‘기후드로잉-휴먼네이처’를 설명하고 있다. 최승희 기자
퍼잡스키는 동시대에 벌어지는 정치 사회 경제 이슈를 단순하면서도 해학적인 드로잉으로 표현한다. 1990년 동유럽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후 정치저널에서 복잡한 국제 정세의 변화를 알리는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번 작업은 부산현대미술관의 새 전시 ‘자연에 대한 공상적 시나리오’에 참여하면서 이루어졌다. 작품명은 ‘기후 드로잉-휴먼 네이처’. 인간이 짓밟고 있는 자연의 신음을 드로잉으로 작업했다. 간결한 그림에 해학적 요소를 담는 작가에게 가장 효율적인 도구는 ‘언어’. 언어유희를 즐기는 그는 부산현대미술관의 약어 ‘모카(MOCA)’라는 한 단어만으로도 떠오르는 여러 생각을 유쾌하게 쏟아냈다.

“모카는 루마니아어로 ‘프리(free)’를 뜻해요. 뮤지엄은 사회적 주제를 자유롭고 비판적으로 다룹니다. 그러나 이곳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이고 결국 돈(예산)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정치적 기관이죠. 예술은 ‘프리’라고 하지만, 모든 게 돈으로 환산되는 곳이 뮤지엄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산현대미술관은 모카(프리)라고 해서 흥미로웠죠.”

미술관 내부 계단 난간 유리에 그린 드로잉 작품. 최승희 기자
을숙도라는 자연 속에 안긴 미술관이라는 점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도심이 아니라 자연 한가운데 인공적인 미술관이 서 있군요. 모순적이고 상충하는 공간이라 독특해요. 화이트큐브라는 인공적 공간에서 한 발짝만 나오면 자연이 펼쳐지는데, 그 자본주의 공간은 또 프리(공짜)인 점이 재밌어요.”

퍼잡스키는 작업할 때마다 스케치 수첩을 만든다고 했다. 이번 작업을 위해 3개월 전부터 사전조사와 부산에서의 영감으로 채운 2개의 수첩을 보여줬다. 작품으로 옮겨진, 또 그러지 못한 아이디어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기에 단어의 뜻보다는 형태나 의미에 주안점을 둔 작업들이다. 한글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형태가 비슷한 영어 ‘Off-Off’로 쓰고 쉼, 휴식이라는 의미를 살리는 식이다.

‘삶’과 ‘자연’이라는 한글도 보인다. ‘삶’이라는 단어를 택한 이유를 묻자 “받침이 숫자 ‘20’처럼 보였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때 ‘20’은 20세기일 수도 있고, 20년 전, 20년 후 등 시간 개념으로 해석됐다. 글자 위에는 사람이 앉아있기도 하고 위태롭게 서 있거나 매달려 있기도 했다. 삶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감정과 상태를 표현한 것. ‘자연’은 글자 획마다 잔뿌리를 그려 이미지를 시각화했다.

“제 그림에 정해진 의미는 없어요. 관람객이 저마다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거죠. 영어를 몰라도 이미지를 가지고 유추할 수 있게, 수수께끼처럼요.”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들의 눈길을 잡으려면 처음엔 쉽고 재밌게 보여져야 한다고도 말했다. “평소 생각을 스케치하며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오로지 흰색(가끔 검은색) 마커로만 작업한다. 쉽게 지워질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외벽 유리에 그린 작업은 비, 더위 등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 미술관은 전시 기간과 무관하게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보존했다가 훼손이 심해지면 지워낼 예정이다. 작가는 개의치 않았다. 그 이유를 네 가지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freedom(자유)’. 영원한 것은 없으며, 자신 또한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antimarket(안티마켓)’. 미술관의 작품 소장은 자본주의 논리라는 이유다. 세 번째로 그는 “내 작업은 댄스와 같은 ‘performance(퍼포먼스)’”이며 “그림이 그려진 안과 밖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transparency(투명성)’가 마지막 이유”라고 말했다.

퍼잡스키의 드로잉으로 시작하는 전시 ‘자연에 대한 공상적 시나리오’(미술관 2층)는 기후위기라는 전 지구적 공통과제가 부여된 시기, 동시대 미술이 지향해야 할 ‘친환경’이란 무엇인지 모색하는 자리로 기획됐다. 전시는 내년 1월 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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