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가장 먼저 보는 얼굴은 아마도 세면대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사람이 머무르는 장소뿐만 아니라 화장용품, 인테리어, 전시연출 등 다양한 형태와 용도로 쓰이는 거울은 오늘날 가장 일상적인 물건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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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동 출토 국화무늬 청동거울의 끈 흔적(흰색 점선)과 ‘가상부귀(家常富貴)’명 청동거울. 부산박물관 제공 |
우리나라에서 유리거울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지는 10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중국 청나라를 통해 유리로 된 거울을 수입하기 전인 18세기 조선 시대까지 왕실이나 양반 가문을 중심으로 ‘청동거울(銅鏡)’을 썼다. 흔히 박물관이나 역사 교과서에서 실물로 접하는 청동거울은 중간에 고리(꼭지)가 달리고, 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원래 무늬나 고리가 있는 면이 뒷면에 해당하고, 실제로 앞면은 무늬가 없이 매끈하다. 지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 녹슬어 청록색을 띠지만 제작되었을 당시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구리색이었다. 오늘날 잘 닦여져 광이 나는 놋그릇을 연상하면 유리만큼은 아니어도 흐릿하게나마 모습을 비추는 데 지장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청동거울의 기원은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자들은 둥근 거울을 통해 반사된 빛이 태양을 형상화한 것으로 당시 제사장 또는 지배자들이 가질 수 있는 상징적인 기물이었다고 말한다. 청동거울은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시대까지 주로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에 부장되어 정치적 권위의 상징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려 시대부터는 본래 용도인 화장 도구로서 실용성이 강조돼 국내에서 대량으로 생산했다. 특히 불교가 건국이념이자 국가신앙으로 정착하면서 청동거울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법구(法具)로써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부산박물관 동래관에는 9점의 고려 시대 청동거울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 중 5점이 덕천동 유적(3점)과 삼국시대 고총고분군으로 잘 알려진 연산동 유적(2점)의 고려 시대 무덤에서 출토됐다. 연산동 유적의 청동거울 2점은 청동그릇과 청동숟가락 등과 함께 발견됐는데 둥근 형태에 고리가 1개인 것을 제외하고 크기와 무늬에서 전혀 다르다.
큰 거울은 직경 16㎝이고 뒷면에는 국화문 수십 개가 새겨져 있다. 특히 중앙 고리부터 바깥까지 끈이 부착된 흔적이 잘 남아있는데, 받침대나 벽에 매달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거울은 직경 9.8㎝이고 ‘가상부귀(家常富貴)’라는 글자 사이에 여덟 마리의 새와 네 개의 꼭지(四乳八鳥文) 등이 새겨진 화려한 무늬를 자랑한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고려 시대 유적 중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거울의 수량이 90%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고려 시대부터 실용도구로 적극 사용된 청동거울이 무덤에 부장된 이유는 ‘가상부귀’에서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살아생전 곁에 두고 쓴 거울을 무덤 안에 둠으로써 내세에서도 부귀영화가 가득하길 염원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옛 선조가 남긴 일상에서 죽음까지 비추는 청동거울 관람하기’.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 가족과 함께 부산박물관 나들이를 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