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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중앙에 있는 ‘변방’…묵묵히 지켜온 3000년 고도

박선정 소장의 달리 인문여행 2 <1> 키르기스스탄 오시에서 여행을 시작하며

  • 박선정 인문학당 달리 소장
  •  |   입력 : 2023-08-15 18:41:30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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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우즈벡·타지키스탄에
- 중국과도 접경한 키르기스스탄
- 영웅 마나스의 신화를 간직한
- 매료될 수밖에 없는 사람과 땅

- 몽골과 소련의 침략과 지배는
- 지독한 가난까지 안겨줬지만
- 불모의 땅을 끝끝내 일궈와

키르기스스탄 여행의 중반 즈음 한 숙소 식당에서 반가운 커피를 발견했다. 한잔을 채운 후 때마침 식당으로 들어서는 한 여행객에게도 권했다. 그런데 그 청년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감사합니다만 사양할게요. 제가 이제 ‘중앙화’(centralized)되어서요”란다. 이곳은 커피 문화가 아니라 차 문화다. 이곳의 문화를 환유로 답한 멋진 위트였다. 그날 저녁 세계인들이 모인 식사 자리의 주제는 ‘센트럴라이즈(중앙화)’였다. 중앙아시아에서도 중앙에 끼어 있는 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나라인 키르기스스탄에 관한 이야기와 여행을 통해 얼마나 매료되고 현지화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시 말해, 세계지도에서 가장 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정작 별다른 관심도 받지 못한 채 경제력과 힘에서 밀려 변방인 채로 존재의 의미조차 드러나지 않는 이 나라가 어떻게 자신들을 매료시켰는지에 대한 고백들이라 하겠다.
오시의 중앙에 있는 ‘술레이만산’에서 내려다 본 오시 전경과 입구의 모스크.
키르기스스탄은 북쪽과 서쪽과 남쪽으로 각각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타지키스탄과 접경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땅의 크기는 대략 남북한을 합한 크기보다 조금 작지만, 인구는 그 8분의 1 정도다. 70% 정도가 키르기스인이고, 우즈베키스탄인도 대략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 우즈베키스탄과의 국경지대인 남서쪽에 거주한다. 국토 대부분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90% 정도가 해발 1500m 이상이며 해발 2000m가 넘는 곳이 71% 정도다.

술레이만산 중턱의 자연 동굴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사진은 동굴 속 박물관 내부.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이식쿨 호수를 중심으로 4만 년 전에 이미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키르기스인의 정착은 훨씬 이후로 추정된다. 키르기스인들은 원래 시베리아의 예니세이강 상류에 살던 투르크화된 몽골족의 후손으로, 대략 15~16세기께 현재의 키르기스스탄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대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원래 키르기스인들은 ‘눈동자가 초록색이며 피부가 하얗고 머리카락은 붉은빛을 띤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외모의 그들이 유목을 통한 이주를 반복하고 주변의 민족들과 혼혈관계를 이으면서 현재의 다양한 외형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키르기스’는 40을 뜻하는데, 이 숫자의 의미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40개의 부족’과 ‘40명의 소녀’가 그것이다. 첫 번째 의미는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고자 하나로 뭉친 40개의 부족을 의미한다. 그러니 40개의 다양한 부족이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산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40명의 소녀가 산 위의 호수에서 수영한 후 임신을 하여 40명의 아이를 출산했는데 이들이 키르기스인의 조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모두 ‘마나스의 대서사시’에 등장하는 얘기다. 희랍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있다면 키르기스스탄에는 ‘마나스의 서사시’가 있다. 50만 행에 달하는 이 엄청난 서사시는 전적으로 구전으로 후세대에 전해졌는데 이곳에서는 각종 행사에서 이를 노래로 부르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자 예식이다. ‘마나스’의 서사시를 암송하여 부르는 사람을 ‘마나스치’라 부르며 아주 특별히 대우하는 데서 이들의 마나스 사랑이 드러난다. 이들에게 마나스는 자신들을 외세로부터 지켜낸 민족의 영웅이자 수호신이고 올바른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던 참된 스승이자 위대한 철학자였다. 7세기께 이 지역으로 이슬람 종교가 전파되면서 이슬람교도가 되기 이전에 이들에게는 이미 대자연을 향한 토템 신앙과 함께 ‘마나스’라는 정신적 주춧돌이 있었던 셈이다.

키르기스스탄 남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자연경관. 여름철 들판을 뒤덮은 야생화와 멀리 산봉우리를 감싼 백설이 이곳이 중앙아시아임을 말해 준다.
위대한 영웅 마나스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며 거친 산맥을 오르내리는 유목 생활을 해왔던 키르기스인들이지만, 한때는 몽골의 지배와 소련의 지배 속에서 자유를 억압당한 채 살아야 했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다시 자유를 되찾지만, 그 기쁨도 잠시, 소련의 자본과 산업이 빠져나간 자리는 엄청난 가난과 혼돈을 초래했다. 하지만 불모지와도 같은 땅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이곳의 야생화처럼 이들은 다시 땅을 일구고 말을 달리고 낡은 자동차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의 시작은 키르기스스탄 제2의 도시이자 실크로드의 중간 경로로서의 오랜 역사가 숨 쉬고 있는 ‘오시’에서 시작한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인 비슈케크에서 다시 비행기로 50여분, 또는 자동차로 10시간 이상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오시에 도착한다. 이곳은 주변의 높고 거친 산세가 잠시 숨 고르기를 하는 분지다. 해발 963m 정도의 고도이며 거의 3000여 년 전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보다도 더 긴 역사를 품은 도시다.

오시 바자르에서 사과를 사든 채 버스를 기다리는 현지인. 사계절용인 모자는 여름에는 뜨거운 햇살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고 겨울에는 보온이 된다.
도시 한 가운데에는 눈에 띄는 바위산이 있다. ‘술레이만 산’ 또는 ‘솔로몬의 왕좌’라고 번역되는 ‘술레이만또(Sulaiman-too)’다. 이곳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들에게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로 향하던 도중에 이곳을 지나면서 쉬었다는 전설과 솔로몬 왕이 이곳 산 위에서 잠을 잤다는 데서 산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16세기 초 오늘날의 인도와 그 인근 지역을 장악하고 무굴왕국을 건설한 자히르 알딘 무함마드 바부르가 이곳을 방문하고는 솔로몬의 왕좌에 사원을 짓게 했는데, 그 이후로 이곳은 이슬람교도들의 성지가 되고 있다. 특히 이 바위산 안에 있는 동굴에서 기도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전설에 소원을 이루려는 사람들로 늘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오시는 기원전부터 동양과 서양의 교역을 잇는 실크로드의 한 허브이자 장사꾼들과 유목민들이 쉬어가는 거점으로서도 중요한 곳이었다. 지금도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바자르)인 ‘오시 바자르’가 이곳에 있다. 그러나 지정학적으로 우즈베키스탄과의 접경지역에 있는 데다가 거주민들의 많은 수가 우즈베키스탄인들이다 보니 종종 두 민족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더욱 가시화되면서 2010년에는 약 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유혈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갈등의 기저에는 경제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

아픈 역사를 껴안은 채 오늘의 오시는 중심 번화가인 오시 바자르를 중심으로 다양한 민족들과 여행객들로 분주하다. 특히 약 7100m의 레닌봉을 가기 위한 마지막 거점도시라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도시의 시계는 세계 어디서나 바쁘게 돌아가나 보다. 키르기스스탄도 예외가 아니다. 건조한 날씨와 여름의 강렬한 태양 아래 낡은 자동차들이 흙먼지를 날리면서 어울리지 않는 경적을 울려대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 길을 가고 있다.

고대도시를 형성한 신성한 바위산과 기도 동굴을 다녀오고, 오시 바자르를 구경하면서 고산지대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고, 이곳의 우유로 만든 신선하고 맛있는 길거리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면, 달리 오시에서 할 일이 없어 보인다. 이럴 때면 도시의 공해와 번잡함을 벗어나기 위해 어서 짐을 꾸려 자연이 살아 숨 쉬는 태곳적 그곳으로 향하는 게 정답이다. 다음 목적지는 해발 2980m 고산 마을인 ‘사리 모골’(Sary-Mogol)과 레닌봉 아래 유르트 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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