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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17> 보리밥의 추억

허기진 옛 추억을 채우고, 모자란 영양소도 챙기고…여전히 고마운 보리밥 한끼

  • 최원준 시인 · 음식문화칼럼니스트
  •  |   입력 : 2023-06-20 19:21:05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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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궁기 굶주린 배 채워준 보리
- 말린 풋보리 감자와 버무리거나
- 김치 넣고 뻑뻑하게 끓여 먹어
- 눈물의 보릿고개 지난 우리나라
- 언제 그랬냐는 듯 쌀마저 넘쳐나

- 밀양아리랑시장 내 보리밥골목
- 강된장·겉절이와 내 온 한그릇
- 소박하고 기꺼운 그 맛에 반하다

얼마 전 밀양에 다녀왔다. 밀양 간 김에 내일동에 있는 밀양아리랑시장의 ‘보리밥골목’에 들러 보리밥을 먹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옛날 방식으로 밥을 쪄서 간이 센 시골식 반찬과 함께 내는 집이다. 한 두어 평쯤 될까? 식당 중앙에는 기다란 탁자가 놓여있고, 그 위에 각종 반찬을 한 양푼씩 담아 놓았다. 식탁 주위로 쪼그려 앉는 앉은뱅이 목포 의자가 두 개. 마치 식당 안을 장터 난전 밥집처럼 꾸며 놓았다.

아침에 갓 담근 벌건 배추김치가 포기만 잘라 놓아 푸짐하고, 토속 된장에 박아 놓았던 고추장아찌도 입맛을 돌린다. 온갖 푸성귀를 넣고 조물조물 버무린 겉절이도 좋고, 정구지김치 열무김치 등 여러 종류의 김치 무나물 콩나물 무청 시래기나물에다 파릇파릇한 상추와 푸들푸들한 다시마도 한몫한다. 짭짤한 강된장도 참 맛깔스럽다. 이를 밥 한술에 척척 올려 먹고, 한 손 가득 쌈 싸 먹고, 이것저것 두루 넣어 쓱쓱 비벼 먹는 것이다. 보리밥을 다 먹고는 맵고 짭조름한 입을 씻어주는 화룡점정 보리밥 숭늉! 오랜만에 소박하면서도 기꺼웠던 밥상이었다.
과거 ‘가난의 상징’이었던 보리밥은 오늘날 건강식, 추억의 별미로 소비된다. 사진은 보리밥상.
■춘궁기 대명사, 보릿고개

보리는 쌀 밀 옥수수 콩과 더불어 인간의 5대 곡물 중 하나로, 농경 시대 때부터 쌀과 함께 오랫동안 주식으로 삼았던 곡식이다. 보리는 주식뿐만 아니라 빵 과자 국수 등의 식재료로, 그리고 엿기름과 식초 등 발효식품의 원료로도 활용된다. 더불어 맥주 위스키 등의 주류, 동물사료 등의 원재료로도 널리 쓰이는 곡물이기도 하다.

보리는 주로 중동 지역과 인도 북부, 중국 남부 지역 등에서 기원전 1만8000년~1만7000년께부터 재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는 3000년 전쯤에 중국에서 전파된 것으로 보이며, 문헌상으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 민족의 중요한 작물로서 재배되었다고 전해진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인 주몽이 부여의 박해를 피해 떠날 때 어머니 유화부인이 비둘기를 이용해 보리 종자를 전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보리는 우리 민족에게는 특히 소중하고 고마운 곡물이었다. 원래 쌀을 주식으로 하는 민족이지만, 한 해를 오롯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쌀을 자급하지 못했던 시절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머지 대부분을 보리가 채워주었다. 해서 가을 추수 뒤 봄 모내기 이전까지 유휴지에 보리를 파종·수확하는 영농법이 개발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식량 수급이 그나마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그래도 일반 서민인 하층민은 가을에 수확해 둔 곡식이 떨어지는 초봄부터 보리 수확 철까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춘궁기(春窮期)를 겪는다. 이 시기를 두고 ‘먹고살기가 고개를 오르듯 힘들다’는 뜻으로 ‘보릿고개’라 부르며 일 년 중 가장 혹독한 계절로 여겼다. 오죽하면 중국에서 가장 험하고 신령스러운 태산(泰山)보다 높은 것이 보릿고개라는 속담이 있었을까? 이 눈물의 보릿고개는 일제 강점의 수탈기와 한국전쟁 시기, 경제개발이 이뤄지기 이전인 1960년대까지도 존재했다.

갱시기죽
당시에는 풀뿌리 나무껍질도 양식으로 먹었다는데, 그나마 초봄에는 산들에서 나는 나물을 뜯어다가 보리쌀 등 소량의 곡식과 된장 고추장 물을 풀어 ‘나물죽’을 끓여 먹었다. 그러나 곡식 한 톨 남아 있지 않은 집에는 눈물을 머금고 보리알이 익기 전인 풋보리를 베어다가 작두로 잘게 썰어 이를 볶고 말려, 감자와 섞어 먹거나 범벅으로 끓여 먹었다고 한다. 바로 ‘짝두보리범벅’이다. 김치와 밀가루, 봄나물을 넣고 뻑뻑하게 끓여낸 ‘갱시기’나 ‘꾹죽’도 보릿고개의 아픈 기억을 가진 음식 중 하나이다.

그러하기에 보리 수확 철은 기층민에게 축복의 계절이자 가장 기다리던 때였다. 그만큼 보리는 서민에게는 가장 친숙하고, 가까이에서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며, 끼니를 책임져 주었다는 것이다.

보리나 보리밥으로 생겨난 속담 또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중 몇 가지 속담을 들면 ‘보리방아 찧을 때면 죽은 시어머니 생각난다’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 ‘양반은 트림하고 상놈은 방귀 뀐다’ 등이 있다.

그만큼 보리(밥)는 서민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힘든 삶 속에서 그 곁을 지켜왔기에 신산했던 생활을 한탄할 때 단골로 쓰였던 소재이기도 했다.

■‘꽁보리밥’, 추억의 별미로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밀양아리랑시장 보리밥골목 전경.
우리가 곡식으로 사용하는 보리는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겉보리’와 ‘쌀보리’ ‘찰보리’ 등이다. 맥주 재료로 쓰이는 ‘맥주보리’와 동물사료용의 ‘청보리’도 재배하고 있기도 하다. 겉보리는 보리 알곡을 싸고 있는 겉껍질이 단단히 붙어있어 잘 벗겨지지 않는 보리이고, 쌀보리는 겨가 잘 벗겨지는 보리이다. 찰보리는 쌀보리 중 찹쌀처럼 찰기를 가진 보리다.

겉보리를 찧은 것이 ‘늘보리’라고 한다. 이 늘보리만으로 밥을 한 것을 예전에는 ‘꽁보리밥’ ‘꽁당보리밥’이라고 불렀다. 보리는 수분 흡수율이 떨어져 쌀과 함께 밥을 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물에 불리거나 따로 찌거나 삶아서 이차로 쌀과 함께 넣고 밥을 짓는다. 이 때문에 식감이 거칠고 찰기가 없을뿐더러 미끄덩거리며 입에서 따로 놀아 흔쾌한 맛은 아니다.

이런 번거로움 때문에 개발된 것이 보리를 압착한 ‘압맥’, 압맥을 둘로 나눈 ‘할맥’ 등이다. 이들은 쌀과 함께 안쳐 밥을 지을 수가 있었고 맛과 식감 또한 개선되었다. 1970년대 정책적으로 혼분식을 장려하고, 학교에서 혼식 도시락 검사를 하던 시기에는 꽤 인기 있었던 혼식 재료였다.

그러나 요즘은 먹기가 그리 쉽지 않은 음식이 보리밥이다. 오래전 쌀 생산량이 소비량을 훨씬 넘어섰고, 해가 갈수록 쌀 소비량은 줄어 생산량을 조절해야 할 처지이다.

보리는 쌀을 대신하여 함께 먹어 왔던 ‘보충재’나 ‘대용재’였기에 쌀이 남아도는 마당에 보리밥의 소비가 늘어날 수는 없겠다. 그나마 건강 식단이나 옛 추억의 별미로 소비되는 경우가 있어 몇몇 전문 식당이 운영되고 있을 정도이다.

가난한 이들의 밥상을 의미하는 보리밥. 그나마 보릿고개 때에는 이 보리밥마저도 먹을 수조차 없었던 ‘가난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건강밥상에는 빠트리지 않는 소중한 곡물이 보리이다. 고혈압, 당뇨 예방 및 심장 및 장 건강에 필수적인 식품으로 인식되기에 그렇다.

보리누름 철을 지나 보리 수확 철이다. 옛날에는 접힌 허리 잠시 펴던 시기가 이즈음이다. 날이 덥다. 더운 여름 선선한 그늘에서 갖은 채소 겉절이와 나물 등속을 보리밥과 쓱쓱 비벼 토속 된장과 함께 한 입 크게 먹으면 초여름 더위도 그리 성가시지는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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