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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7> 메밀묵과 영주 태평초

메밀묵 넣은 경북식 김치찌개…유배 온 선비들 태평성대 빌던 음식

  • 최원준 시인 · 음식문화칼럼니스트
  •  |   입력 : 2023-01-31 20:03:08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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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백하고 부드러운 식감 메밀묵
- 묵밥 등으로 차게 먹는 겨울별미

- 돼지고기·김치 함께 끓인 태평초
- 뜨끈한 찌개·전골로 먹는 것 특이
- 단종 복위 꾀하다 숙청된 정치인
- 조선의 안위 걱정하던 마음 담아

- 부산 안창마을·구포시장 등 맛집
- 막걸리 안주, 주전부리로 인기
- ‘태평초’ 스토리텔링 눈여겨볼 만

어린 시절 밤이 깊어 까무룩 잠이 들 때쯤, 어슴푸레 꿈결처럼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메밀묵 사려~ 찹쌀떡.” 메밀묵 장수의 길고 구성진 메밀묵 파는 소리….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이처럼 50~60년 전만 해도 시골 마을 어귀부터 도시 골목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메밀묵 장수는 밤이 이슥할 때까지 메밀묵 찹쌀떡 따위의 주전부리를 팔았다. 더구나 밤이 긴 겨울, 잠 못 드는 이들에게는 안성맞춤의 입가심 간식거리가 바로 이들이었다.

특히 메밀묵은 한겨울 추운 날씨에 먹어야 제맛으로, 슴슴하고 담박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 약간 거친 듯한 메밀의 사그락거리는 밀도 등이 아주 매력적인 음식이다. 겨우내 꽁꽁 언 얼음을 깨고 한 사발 꺼내 온 동치미 국물과 곁들이면 그 짝이 없을 정도의 궁합을 이루기도 한다.
경북 영주만의 ‘스토리’가 담긴, 영주의 명물 음식 태평초. 메밀묵에 돼지고기와 신김치를 넣어 찌개나 전골 형태로 보글보글 끓여 냄비째 푸짐하게 먹는다.
■ 전국 별미 메밀묵

메밀묵의 원재료인 메밀은 우리 민족에게는 꽤 오래전부터 식생활에 활용해온 친숙한 곡물이다. 고려 고종 때인 1236년 저술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메밀의 기록이 있는 것만 보아도 이미 그 시대 이전부터 먹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에 따르면 메밀의 어원은 ‘뫼(산)에서 나는 밀’로 볼 수 있다. 이는 메밀이 자생 환경에 포함된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잘 생장하기에 척박한 땅, 특히 산간 지역지에서 주로 재배한 것과 관련이 깊다고 하겠다.

이 메밀을 우리 민족은 국수로, 묵으로, 부침개로, 다양한 음식을 빚어 먹어왔다. 국수는 평안도의 냉면과 강원도의 막국수가 대표적인 메밀 음식이다. 묵 또한 지역을 가리지 않고 즐겨 먹어 왔던 음식이다. 강원도에서는 메밀로 다양한 전을 부쳐 먹기도 한다.

사각틀에서 굳고 있는 메밀묵.
그중 메밀묵은 시간과 정성, 고된 노동이 여간 많이 들어가는 음식이 아니다. 껍질을 깐 메밀을 베 보자기에 넣고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바락바락 치대면 메밀 전분물이 나오는데, 이를 가마솥에 넣고 오랜 시간 뭉근하게 저어주며 끓이다가 전분물이 차질 때쯤 뜸을 들인 뒤 틀에 넣고 굳힌다. 맷돌에 통 메밀을 직접 갈아 전분물을 만들기도 한다.

메밀 음식은 전국에 걸쳐서 별미로 먹어 왔는데, 대표적으로 경북의 영주 안동 봉화 문경 지역에는 메밀묵밥을 즐겨 먹는다. 경주에는 메밀묵 해장국을 파는 ‘팔우정 해장국 거리’가 있고, 강원도 봉평 평창 영월 등지의 장터에서는 사시사철 담담한 메밀묵을 맛볼 수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경남 창녕 영산장의 허름한 식당에서 새콤한 식기(밥식해)와 곁들여 먹었던 메밀묵과 합천의 한 종갓집에서 직접 쑨 메밀묵이 가장 깊이 인상에 남는다. 부산에도 동구 범일동과 부산진구 범천동에 걸친 안창마을의 입구에 있는 메밀묵 집에서 직접 담근 막걸리에 걸쳐 먹던 메밀묵과 구포시장의 신김치가 맛있는 메밀묵 선술집, 초량 언덕배기 동네 막걸릿집의 메밀묵 등도 좋았던 것 같다.

묵을 쑨 날에는 어김없이 구수한 메밀묵 누룽지를 한 보시기 내어놓던 안창마을 메밀묵 집은 주인장이 연로해 가게를 접었다. 생각할수록 아쉬움이 남는 집이다.

메밀묵은 그냥 주전부리나 막걸리의 술안주로도 좋지만, 밥과 함께 끼니로도 근사하다. ‘묵밥’이나 ‘묵 조밥’이 그것이다. 멸치육수에 묵을 채 썰어 넣고 김 가루, 통깨에 참기름 두어 방울 넣은 양념장을 곁들어 먹는데, 이때 식은 밥이나 노란 조밥을 말아 훌훌 들이켜듯 먹는 것이다. 여기다 신김치 송송 썰어 넣어 먹으면 설명이 필요 없는 금상첨화의 일미를 맛볼 수가 있겠다.

■ 영주 별미 태평초

메밀묵
경북 영주에도 메밀묵은 중요한 음식으로 대접을 받는데, 영주 지역 사람들이 즐겨 먹는 메밀묵 음식은 다소 특별하다. 메밀은 찬 성질의 음식이라 주로 차게 해서 먹는 편이다. 냉면이나 막국수, 묵채 또한 그렇고 묵밥도 찬 육수에 말아 먹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영주 지역에서는 차게 먹는 ‘메밀묵밥’과 더불어 메밀묵을 찌개나 전골 형태로 보글보글 끓여서 뜨끈하게 먹기도 한다. 더구나 돼지고기와 신김치를 넉넉히 넣어서 냄비째 푸짐하게 끓여 먹는다.

양념한 돼지고기를 참기름에 볶다가 신김치를 넣고 육수를 자작하게 부은 다음 메밀묵과 각종 채소 등속을 넣고 보글보글 끓여 낸다. 그 이름 또한 남다르다. 나라의 태평성대를 염원한다는 뜻으로 ‘태평초’라 이름 지어졌다.

내려오는 일설에 따르면 조선 시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을 비롯한 정치인과 선비들이 대거 숙청당하거나 혹독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시절 이들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태평성대를 빌며 연명하던 음식이라고 ‘태평초’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영주 사람들은 이 ‘태평초’를 메밀묵과 돼지를 함께 넣어 먹기에 ‘돼지묵찌개’ ‘묵두루치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이 태평초에 쓰이는 메밀묵은 일반 메밀묵과 달리 식감이 탱글탱글 오동통한 탄력이 있다. 메밀묵 겉의 탄탄한 부분을 주로 사용하여 오래도록 조려내는 과정을 거치기에 쫄깃함과 고소한 맛이 더하게 된다.

큼지막한 돼지고기와 잘 익은 김치 등속이 뜨끈하면서도 넉넉하고, 맵고 진하면서도 속을 시원하게 풀어내므로 한 끼 식사보다는 영주 술꾼들이나 어르신들의 술국, 술안주로도 인기가 높은 음식이다.

■ 음식과 이야기

영주 지역 향토음식 ‘태평초’에는 음식 속 그 지역의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로 그려 넣고, 이를 통해 ‘역모의 도시’로 낙인찍혔던 곳을 ‘충절의 고향’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태평초’를 통해 역모를 꾀한 것이 아니라, 태평성대를 위한 민본사상(民本思想)과 덕치주의(德治主義)의 회복을 꿈꾸었다고 웅변하는 것이다.

모든 문화가 다 그렇겠지만, 음식문화도 각각의 지역 특성이나 음식, 식재료 등에 얽힌 이야기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 특히 향토음식은 음식의 유래 및 역사, 그 지역 정착 과정 등이 지역정서의 특성에 맞는 스토리텔링으로 구구절절 스며있어야 한다.

사람과 음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에 민족이나, 국가, 심지어 조그마한 마을의 생활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그곳 사람들의 음식을 들여다보는 것은 당연하다. 음식은 사람의 기질과 지역의 정체성을 거울처럼 반영하기에 그렇다.

동래도호부나 임진왜란, 조선통신사, 왜관과 근대도시,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임시수도와 피난 도시 등 다양한 역사를 간직한 부산이 영주의 태평초에 관한 스토리텔링을 유심히 살펴봐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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