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메마름, 인간의 일상적 행위에 가치를 주는 믿음의 부재, 생산이 없는 성(性), 재생이 거부된 죽음에 대한 시.” ‘황무지’를 번역한 황동규 시인은 주제를 이렇게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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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퍼시빌을 맞이하는 어부왕(왼쪽 두 번째). |
청년 시절 황 시인은 엘리엇이 던져놓은 ‘너무 비인간적인’ 예술론을 읽고 심적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황무지’를 재번역하면서 새 면모를 봤다. “엘리엇이 낭만주의와 치열하게 싸웠음에도 정작 그의 시에서는 낭만주의적 요소가 많이 보인다. 아울러 예술가적 주체의 고뇌도 읽힌다.”
엘리엇은 직접 단 원주에서 ‘황무지’ 구조를 보여준다. 우선, 여성 작가인 제시 웨스턴(1850~1928) 작 ‘제식(祭式)에서 기사 이야기까지’(1920년)에서 제목과 구성, 많은 상징을 얻었다고 밝혔다. 웨스턴은 식물 신화와 의식이 기독교 성배 전설과 어떤 관계인지를 파헤쳤다. 어부 왕(피셔 킹, 중세 성배 신화의 주인공, 불임을 상징) 이야기에서 풍요 신화의 원형을 읽어낸 성과가 그중 하나. 어부 왕은 척박한 자신 왕국에서 낚시로 소일하며 자신을 치유해 줄 사람을 기다린다. 엘리엇은 자신에게 또 다른 영감을 준 작가로 ‘황금 가지’를 쓴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1854~1941)를 꼽았다. 식물 신화와 풍요 의식을 다룬 대목에서 많은 걸 얻었다고 원주에 썼다. 프레이저 ‘황금 가지’가 없었다면 ‘황무지’는 빛을 덜 발했을 것이라는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