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이병주 타계 30주년…나림 문학과 아나키즘 <9> 이병주 문학과 학문의 길

해방 전후 복잡한 현대정치사 … 나림 소설들 읽으니 머리에 쏙쏙

  • 조광수 전 영산대 중국학과 교수
  •  |   입력 : 2022-07-03 19:25:24
  •  |   본지 15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 19세기말 美풍자 ‘오즈의 마법사’
- 권력 속성 이해하는 훌륭한 자료

- ‘관부연락선’ ‘지리산’ ‘그해 5월’
- 현대사 균형감 있고 정제된 표현
- ‘장자에게 …’ 등 갈수록 큰 울림

10대 말, 한창 난독(亂讀)을 하던 시절이다.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거운 주제에 두꺼운 책이면 무조건 읽어야 한다며 과욕을 부렸던 적이 있었다. 즐기는 독서가 아닌 싸우는 독서가 보람이 있을 리가 없다. 결과는 후줄근한 겉멋 한 자락이었다. 계통 없는 난독은 난독일 뿐이었다.
중국 고대 대사상가 노자(왼쪽)와 ‘오즈의 마법사’ 뮤지컬에 등장하는 마스크를 쓴 주인공. 이 글을 쓴 조광수 전 영산대 교수는 정치학 수업에서 권력에 관해 강의할 때 ‘오즈의 마법사’를 먼저 소개했다. 국제신문 DB
■‘관부연락선’에 반해 정치사상 전공

그 대목에서 구세주 같은 책을 만났다. 작가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이다. 세상에 이런 글도 있구나 싶어 읽고 또 읽고 하다가 급기야는 경남 진주 하동까지 가게 된다. 작중 주인공 유태림의 행적을 따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그리고 지리산에도 오른다. 내가 정치사상을 전공하게 된 결정적 배경이다. 1974년 일이다. 나와 나림 이병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했고 평생 스승이셨다.

나림 타계 30주기에 독후감을 써본다. 문학 비평은 아니다. 그럴 깜냥이 못 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훈도로 사상을 공부한 정치학도로서 서툰 감상을 몇 마디 표현해볼 뿐이다. 작게나마 학은(學恩)을 갚는 길이기도 하다. 나림이 여러 변주로 묘사한 아나키즘이란 시각으로 ‘이병주 읽기’를 시도해 보았으면 했다.

■소설을 정독하는 이유

나는 소설을 정독한다. 재독 삼독한 소설도 많다. 내가 소설을 고전 읽듯 성실하게 읽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좋은 표현과 적확한 문장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글쟁이 아닌가. 글을 다루는 전문가다. 조사 하나를 선택하는데 밤을 새워 고민한다. 누구보다 언어와 존재 사이의 괴리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도 그런 고뇌가 있었다. ‘노자’의 첫 구절이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보통 말하는 그 도가 아니고, 명을 명이라 하면 그 또한 보통 말하던 그 명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다. 역동적인 존재를 고정적인 언어로 묘사하는 게 못내 양에 차지 않은 것이다. 존재에 대한 언어의 열등성 그리고 본체에 대한 현상의 허구성을 묘사한 기막힌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장자는 그 고민 끝에 우화(寓話)로 부득이한 심정을 표현했다.

셰익스피어도 비슷한 경험을 했나 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장미를 장미라고 하지 않고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는 장미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장미의 향기는 장미라는 이름과 무관하게 향기롭다는 뜻이다. 역시 말과 글을 다루는 전문가는 다르다. 역동적인 삶을 고정적인 언어로써 억지로 표현하는 문인의 요령부득 심정과 고통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다음, 소설은 어려운 주제를 이야기로 풀어주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꼭 쉽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해를 돕는 데는 아주 효과적이다. 이를테면, 권력과 예술의 탄생을 이문열의 중편 ‘들소’처럼 흥미롭게 다룬 소설은 드물다. 권력으로 포장된 폭력의 생성과 몰락 이야기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만큼 재미나게 그린 소설도 귀하다.

권력이란 주제를 말할 때 프랭크 바움이 쓴 ‘오즈의 마법사’는 훌륭한 자료다. 이 정치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져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7세 소녀 배우 주디 갈란드가 부른 주제곡 ‘Somewhere over the rainbow’가 유행하고 있다. 영화는 동화 같은 스토리와 아름다운 음악으로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All’ 등급이지만, 원작 소설은 솜으로 싼 바늘처럼 우화로 당시의 정치경제를 비판한 수작이다.

이를테면 ‘오즈의 마법사’에서 오즈는 금은을 세는 단위다. 그리고 마법사는 정치인이다. 제목에서부터 당시 금 본위 제도를 은 본위로 바꾸자는 주장인데, 구체적으로 캔자스 시골의 소녀 도로시가 신은 은색 구두가 바로 그 의미다.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전환하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농민 노동자 상당수는 몰락해가고 산업 금융 자본가는 흥성하게 된다. 바움은 그런 정치 현실을 비판한 것이고 그걸 수습하는 작업은 마법사인 당시 매킨리 대통령이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용기가 부족한 사자와 두뇌가 없는 허수아비, 마음이 없는 양철남은 제각기 부족한 것을 얻기 위해 도로시와 함께 마법사를 찾아간다.

작가 바움은 당시 큰소리만 치고 무능하기 그지없는 야당 대통령 후보를 겁 많은 사자에, 중서부 지역의 맥 놓은 농민을 뇌가 없는 허수아비에, 그리고 부초 같은 도시 노동자를 심장 없는 양철공에 비유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란 벽돌 길을 따라 여행한다. 그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곡절 하나하나가 다 정치적 함의가 농후하다. 나는 정치학 수업의 권력 강의 때 ‘오즈의 마법사’를 먼저 소개했다.

■나림 소설은 한국 현대정치 필독서

같은 맥락으로 나림의 소설은 한국 현대정치를 공부하는 데 꼭 필요한 교재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전환시대의 논리’도 읽어야 하지만, ‘관부연락선’ ‘소설 남로당’ ‘지리산’ ‘산하’도 더 없는 사회과학 텍스트다. 한국 현대사 특히 해방 전후 복잡다단한 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나림의 소설만큼 균형감 있고 유익하며 흥미로운 자료는 없다. 그리고 ‘그해 5월’만큼 혁명 또는 쿠데타의 정열과 허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은 귀하다. ‘장자에게 길을 묻다’는 아나키즘 이해의 친근한 향도이고, ‘허균’은 니힐리즘의 한 전형이다. ‘바람과 구름과 비’는 망국의 참담함과 신(晨)이란 새 나라 세우기의 열정을 그린 대서사시다. 네이션 빌딩을 위한 기막힌 설계도다. 넓은 시야와 깊은 내공을 꼭 딱딱한 문장으로 된 텍스트가 아닌 술술 읽히는 소설을 통해 배울 수 있다면 불감청고소원 아니겠는가.

■나림은 회색을 당당하게 표방

이병주는 “거대한 회색의 정원”이다. 빨간색도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회색이어서 더욱 빛나는 위인이다. 색깔을 벼슬처럼 자랑하거나 또는 숨기기 급급한 풍토에서 당당하게 회색을 표방한 대인이다. 물론 나림은 “흠이 많은 사람”이다. 그의 자유분방함은 주변을 불편하게 했고, 사치스러운 취향은 말년에 상당한 태작(駄作)을 낳게 했다. 절륜의 에너지와 넘치는 박학강기를 더 멋진 라이프워크 작품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여한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에게 도박과 빚을 나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나에게 나림은 어느 누구보다 친절하고 뜨듯한 향도(嚮導)였다. 딱히 엄하지도 굳이 어렵게 만들지도 않으면서 슬슬 술술 가르침을 베푸는 스승이었다. 무릇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이 있게 마련이고, 그 말을 사람이 듣고 싶은 이야기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림은 가슴 한가득 온갖 사연이 있으며, 그 절절한 사연을 달달한 당의에 싸서 독자에게 전해주는 데 탁발한 재능이 있는 것이다. 역사소설의 전범(典範)이고, 지식인 소설의 전형이다. 그의 소설을 읽는 것 자체로 교양이 늘고 지적 자극을 받게 된다.

고(故) 이윤기 작가가 즐겨하던 말이다. “죽은 지 10년이 지나도 독자가 작품을 찾는다면 괜찮은 작가다. 작가에 대한 평가는 사후 10년이 지나야 한다.” 이윤기의 자존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나림 이병주도 그 범주에 드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활동 시기나 전성기보다 오히려 사후에 더욱 평가받고 있는 작가라 할 수 있겠다. 살아서는 그저 대중 소설가 또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치부되었지만 사후엔 많은 문인과 독자가 정말 그리워하는 대작가로 재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나림이 남긴 말과 글. 남은 자에게 갈수록 큰 울림이 된다.

-끝-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부산에 하나 뿐인데…‘부산예대’ 내년 2월 문 닫는다
  2. 2“능인선원 매각 협상 나서라” 국제신문 사활 건 총력투쟁
  3. 3해운대 벗어나 우리동네로…부산이 온통 극장이네요
  4. 4[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5. 5아침기온 경남 7도, 부산 15도…2일부터 쌀쌀해진다
  6. 6준비 덜 된 경찰시대…‘대국민 수사 실험’ 우려
  7. 7‘반쪽’ 자갈치 축제…내홍에 창립멤버 어패류조합 빠졌다
  8. 8전재수 ‘되돌릴 수 없는 해양수도 기반 조성’ 선언
  9. 9부산중수청 문 여는데 아직 공사중…외부 출입통제도 어려워
  10. 10법리 복잡한 지능범죄 급증…“공부해 수사할 엄두 안 난다”
  1. 1‘교정시설 조성 지원 특별법’ 발의…부산구치소·교도소 통합 뒷받침
  2. 2부산 국힘 “보좌진 유죄 선고…전재수 시장, 시민에 사과해야”
  3. 3국힘, 중수청 앞서 “범죄자 천국될 것” 여론전(종합)
  4. 4李 “김지용, 친윤 아닌 반윤 검사” 중수청장 청문 요청키로
  5. 5靑 “이 대통령 ‘불의의 사고’ 표현, 부상 장병 위로한 것…북한 면죄부 주려는 것 아냐”
  6. 6이 대통령, 김지용 중수청장 후보자 청문요청안 재가
  7. 7전국 교정시설 수용률 126%…윤상현 “형사사법개편 앞두고 교도소 과밀 방치”
  8. 8전재수 “생곡 무산 땐 에코델타에 소각장 불가피”
  9. 9軍·유엔사 “군사분계선 이남 지뢰매설, 北 정전협정 위반”(종합)
  10. 10국정원 “우크라가 北포로 송환 비공개 먼저 요청”(종합)
  1. 1“가덕 공사비 증액 법 개정 앞서 정부 약속부터”(종합)
  2. 2동래 플래그십 문 연 ‘르노’…미래차 R&D센터 내년 오픈
  3. 3북극 누빈 아라온호, 항로예측 기틀 마련
  4. 4신한銀 2만5000명 고객정보 털렸다…당국 조사
  5. 5대선주조 부산 문화 앞장…‘부산국제록페스티벌’ 8년째 후원 행보
  6. 6리사이클링·항만운영·담수화…부산 미래산업 이끌 혁신기술
  7. 7주가지수- 2026년 10월 1일
  8. 8BPA, 5번째 해외 물류거점 구축…베트남 사업 본궤도
  9. 9부산 연구개발 우수성과- 우수학술 부문
  10. 10부산 연구개발 우수성과- 연구혁신 부문
  1. 1부산에 하나 뿐인데…‘부산예대’ 내년 2월 문 닫는다
  2. 2“능인선원 매각 협상 나서라” 국제신문 사활 건 총력투쟁
  3. 3아침기온 경남 7도, 부산 15도…2일부터 쌀쌀해진다
  4. 4준비 덜 된 경찰시대…‘대국민 수사 실험’ 우려
  5. 5‘반쪽’ 자갈치 축제…내홍에 창립멤버 어패류조합 빠졌다
  6. 6전재수 ‘되돌릴 수 없는 해양수도 기반 조성’ 선언
  7. 7부산중수청 문 여는데 아직 공사중…외부 출입통제도 어려워
  8. 8법리 복잡한 지능범죄 급증…“공부해 수사할 엄두 안 난다”
  9. 9“기관장 인선, 유능하면 지역 불문…산은 유치 채널 총동원”
  10. 10검찰 기존 사건 90일 간 수사 가능…대규모 사건이관에 현장혼선 우려
  1. 1송교창·최준용 빠진 KCC…‘루이스 킹’ 희망될까
  2. 2KLPGA 대회 처음 부산서 여는 HJ重… “지역과 상생할 것”
  3. 3메치고 쏘고…한국 유도·양궁 ‘금빛 데이’
  4. 4돌아온 금빛 주역들, 프로야구 막판 순위·타이틀 경쟁
  5. 5HJ중공업, 8∼11일 KLPGA 챔피언십 대회 주최…부산서 처음 열려
  6. 6해볼 만하다…女축구, 8년 만의 AG 메달 도전
  7. 7중원 황인범·투톱 변화…승리 축포 쏠까
  8. 8아시안게임 사격 남자 속사권총 우승…한국 25번째 金
  9. 9윤규성, 태권도 품새 금메달…한국 남자 개인전 3연패
  10. 10독립운동가 후손 재일교포 허미미, AG 여자 유도 57㎏급 금메달
우리은행
미리보는 제31회 BIFF
해운대 벗어나 우리동네로…부산이 온통 극장이네요
미리보는 제31회 BIFF
日 70년史부터 ‘올나잇’ 상영회까지…애니 세계로 초대
궁리와 시도 [전체보기]
노동 운동부터 계엄까지…예술로 사회문제 비추다
비바람 견뎌낸 그의 회화…마침내 ‘고정관념 감옥’서 해방
김민우의 인서트 [전체보기]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의 가능한 사랑
환상이 불러일으킨 파국
문화레시피 [전체보기]
‘부산 발레’ 낙동강 타고 새 물길 열다
붉은 빛 조명, 배우·합창단의 호연…눈앞에 다가온 부산오페라하우스
박현주의 신간돋보기 [전체보기]
약학박사 연륜이 깃든 시조집 外
익숙한 물건에 깃든 삶의 온기 外
박현주의 책 이야기 [전체보기]
노력과 성공은 비례하는가…현대사회 씁쓸한 이면
히말라야 빙하 붕괴로 대참사…더 심각해진 기후 재난
아침의 갤러리 [전체보기]
박자현-꾸지 않는 꿈
장승택-ayered Painting P60-11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기다림의 미학 /윤종순
빨래 /심여혜
주말 영화 박스오피스 [전체보기]
추석 연휴 ‘암살자(들)’ 정상…2위 ‘타짜: 벨제붑의 노래’
‘인턴’, ‘오디세이’ 제치고 정상…허진호 감독 ‘암살자(들)’ 예매율 1위
오늘의 운세- [전체보기]
오늘의 운세- 2026년 10월 1일 (음 8월 21일)
오늘의 운세- 2026년 9월 30일 (음 8월 20일)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전체보기]
할아버지·아버지·본인·아들까지 정쟁으로 죽은 김제겸의 글
아침 산안개를 읊은 조선 전기의 문신 월헌 정수강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