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21년 3월 16일 이 세상을 받았다. 이 해는 나폴레옹이 죽은 지 100년, 도스토옙스키가 탄생한 지 1년 전이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합한 지 10년째이다.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갈피를 잡지 못한 시대다.
내 인생은 필화사건과 그날 밤 회상으로 결정되었다. 국제신보(현 국제신문)는 1961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통일에 민족역량을 총 결집하자’(사진)를 실었다. 그해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터지고 3일 후 19일 오전 9시 남포동 사무실에서 끌려가 8월 말 기차로 서울로 압송됐다. 죄명은 특수범죄처벌법에 관한 법률 제6조 특수반국가행위 위반이었다. 모멸·고문·증거 조작·재판·선고가 이어졌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소급입법으로 용공분자가 되었다. 영하 20도는 영하 30도보다는 덜 찼다. 고독한 황제는 환각 없인 살아갈 수 없었다. 서대문형무소와 대신동 부산교도소는 ‘국립호텔’이었다.
“불행한 작가이지요. 어디에 있어도 시(詩)를 찾으려고 애썼고, 어딜 가나 악(惡)과 비참을 보고 광기에 사로잡혔으니까요. 밤의 거리를 고독하게 방황하며 닫혀진 도어 저편에서 이루어지는 가정(假定)의 생활을 얘기하고, 보는 것, 듣는 것마다 혐오를 느껴선 피와 눈물의 언어로써 우주를 재창조하려고 서둘다가 비참하게 죽었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위한 문학 기행’
“시는 시인의 운명이 완성되길 증오한다”는 두보의 말이 있다. ‘바람과 구름과 비(碑)’ 내 소설처럼 운명이 됐다. ‘제5공화국’ 집필은 중단됐다.
뉴욕에서 감기 기운이 있었다. 귀국 후 정밀검사를 받았다. 폐암으로 서울대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72세. 1992년 4월 3일 오후 4시.
사망 2년 전 학병 세대의 서러움을 정리했다. ‘「그」를 버린 女人’
“이 나라 성인 남자들이 당한 고통을 아십니까? 우린 나면서부터 거짓말을 배웠소. 일제하에 살던 우리 부모는 그들의 아들, 딸이 혹시나 일본에 대해 반항심을 품을까 봐 겁을 냈습니다. 일본에 반항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면 감옥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지요. 학교에 가는 것은 곧 일본인 노예가 되기 위한 훈련이었소.”
“내 경우를 말씀드리면 착한 아이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이행하는 아이여야 하는데 그건 바로 일본에 순종하라는 뜻이었소. 제게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중학생쯤 되어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죠. 그러나 그 사람들은 부모를 슬프게 하고 자신들을 망치려고 환장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들었어요.”
“그렇게 자라고 보니 만주군관학교로 가게도 되고 일본의 사관학교에도 가게 된 겁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름대로의 능력과 기술로 일본의 기구에 끼어들어 살 궁리를 한 겁니다. 생각하면 불쌍한 존재들이지요. 말하자면 나나 그 사람이나 그렇게 크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부모님을 보살피고 가족을 거느려야 할 남자들의 고초를 알아줘야 합니다.”
경남 하동군 북천면에 나림 이병주 문학관이 있다. 만년필·어머니·집필실·초판본을 볼 수 있다. 소설 88권과 수필 40권을 남겼다. 옥창(獄窓) 문학은 절규였고 간절했다. 하태영 교수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