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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인간극장] <8> 붓 - 김종춘 모필장

수백 번 빗질로 날카로운 촉끝 … 이런 붓이어야 칼 이긴다

  • 김민주 기자 min87@kookje.co.kr, 이우정 PD
  •  |   입력 : 2022-03-15 19:49:17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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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나 서화의 도구 뛰어넘어
- 기술발전에도 대체불가한 붓
- 만드는 필장과 유통하는 필상
- 과거 고급기술자로 대우 받아

- 울산시 무형문화재 3호 김 씨
- 10대 때부터 평생을 바친 장인
- 1m 산마필 수천만 원 호가도

- “1950년대 내놓는 족족 팔려
- 수요 줄며 배우려는 이 없어
- 기력 따를 때까지 이어갈 것”

필화(筆禍)의 사전적 의미는 ‘붓으로 쓴 글 때문에 일어난 사단’이다. 붓은 단순히 서예나 서화의 도구를 뛰어넘어 하나의 선비정신이자 권력에 대한 항거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예나 지금이나 붓은 쓰임에 따라 누군가를 찌르는 칼이기도 하고 때로는 입신양명의 수단이기도 했다.
김종춘 모필장이 붓을 만들고 있다. 이우정 PD
붓은 누구나 한 번쯤 쥐어 봤음직한 물건이다. 붓은 다른 필기구와는 구분되는 대체 불가성을 갖고 있다. 펜이나 연필·크레파스·파스텔로는 대신할 수 없는 붓만의 독특한 쓰임새 말이다. 한없이 섬세하면서 때로는 화폭을 찢어발길 듯 거칠다. 기술이 발달해 글쓰기 도구가 PC 자판으로 대체된 요즘도 붓은 뒷방으로 밀려나지 않고 고유의 영역을 공고히 했다.

붓의 연원은 기원전 2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근거는 중국 신석기 시대와 상주·서주시대 유적인 앙소 채색토기. 이 토기에서는 ‘붓이 아닌 다른 것으로 새겼다고 볼 수 없는’ 문양들이 발견된다. 붓의 ‘대체 불가’가 논거인 셈이다.

당시 붓도 현재처럼 동물의 털을 모아(촉) 나무관(붓대)에 고정시키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좋은 붓은 ‘생명선’이라고도 불리는 촉 끝이 날카로워야 한다. 붓모는 굽은 털 없이 길이가 가지런해야 한다. 탄력이 있으면서도 유연해야 먹을 균일하게 뿌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모난 데 없이 둥글며, 낱낱의 털은 곧으면서 수명이 길어야 한다.

국내에선 족제비 꼬리털, 소·양의 겨드랑이털, 산토끼털 등이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맞출 수 있는 붓모로 사용돼 왔다. 털을 삶아 기름기를 뺀 후 빗질로 가다듬기를 수백 차례, 정돈된 털을 촉으로 모아 붓대에 꽂는다.

김종춘 모필장이 제작한 산마필. 크리애드 제공
울산시 무형문화재 3호 김종춘(80) 모필장은 10대 시절부터 전통기법을 지켜 붓을 만들어온 장인이다. 김 모필장의 울산 작업장을 찾아 70년 가까운 세월을 붓 만드는 데 바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 모필장은 6·25 전쟁이 끝난 16세 나이에 경남 밀양에서 붓으로 일가를 일군 김형찬 선생 필방에서 붓을 배웠다. “스승의 필방에서 일하던 기술자가 20명, 그 기술자마다 딸린 조수가 1, 2명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다’라고 표현하던 조수에게 정식 월급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한 달에 하루 꼴로 휴가를 주며 그때 쓸 수 있는 용돈 정도를 챙겨 줬다고 한다.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붓 만드는 일을 배운 지 3년 만에 김 모필장은 스승으로부터 호비칼·치계(치게)·작죽칼(치죽칼)을 받을 수 있었다. 호비칼은 나무의 속을 파내는 데 쓰이는 칼이다. 치계는 붓모를 빗어 정돈하는 데 필요하다. 작죽칼(치죽칼)은 붓대가 되는 나무를 매끈하게 다듬을 때 사용된다. 붓을 만드는 데 필요한 3가지 핵심 도구이자 스승이 ‘필장’으로 인정한 제자에게 하사하는 선물이기도 하다.

김종춘 모필장이 제작한 대형 산마필. 크리애드 제공
이후 김 모필장의 자취를 따라가보면 근대와 현대를 잇는 붓 제작·유통의 궤적을 엿볼 수 있다. 이름 높은 스승에게서 칼과 치계를 하사받은 필장이라고 해서 곧장 자신의 필방을 차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어딜 가든 굶어죽지 않는 고급 기술자로 대우받았다. 이들 필장을 모셔다가 붓을 만들게 하고, 이 붓을 직접 유통하던 이들이 필상(筆商)이다.

김 모필장이 스승의 그늘을 떠나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이는 대전 필상 박원서 씨였다. 그는 박 씨의 집에 3개월간 머물며 붓을 만들었다. 박 씨는 초등학교 문방구와 필방에 이를 내다 팔았다. 김 모필장은 “1950년대는 아직 연필·펜보다는 붓으로 글자를 쓰는 이가 더 많던 시절이다. 내놓는 족족 팔려나가는 재미에 정신 없이 붓을 만들어내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고급기술을 배우려 수소문하던 김 모필장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광주로 흘러든다. 이곳에서 그는 광주 ‘진다리붓’의 대가 안종선 선생의 문하에 들어 기술을 익힌다. 진다리붓은 흰염소의 겨드랑이털로 제작하는데, 수컷의 털만을 사용하며 시기적으로는 매년 1~3월 사이 모은 털을 최상품으로 친다. 황토흙과 쌀겨를 섞어 먹인 오죽(烏竹)을 짚으로 문지른 뒤 햇볕에 2, 3개월 말려 한 토막씩 자른 것을 붓대로 사용한다.

밀양과 광주의 명인들로부터 붓을 배운 김 모필장은 이후 광주와 밀양, 대구 등지에서 제작을 이어가며 이름을 떨쳤다. 1968년 대구필상 이쾌돈·우홍철 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서울 인사동 대신당필방에 붓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김 모필장은 “서예나 회화를 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인사동 대신당필방은 명성이 드높은 곳이었다”고 설명했다. “결혼하면서 이듬해 서울에 정착했어요. 서울의 방 한칸 월세가 1500원가량이던 때인데, 그때 만든 굵기 18㎜ 붓 한 필이 2만 원에 팔려 나갔습니다.” 당시 좋은 붓에 대한 수요와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80년대 들어 붓의 원료가 되는 짐승 털을 구하기 점차 어려워졌다. 김 모필장도 그동안 사용되지 않던 털을 이용해 붓을 만드는 궁리를 시작한다. 그렇게 찾은 게 말의 꼬리털이다. 그는 “호주산과 내몽골산 말 꼬리털을 가져다 산마필을 만들었다. 당시 돈 100만 원을 주고 원료를 구해다 인사동에 내놓으니 1000만 원 수익이 났다”고 했다. 산마필은 그대로 그의 ‘시그니처’ 붓이 됐다. 그가 만들어내는 길이 1m 남짓 대형 산마필은 무게가 8㎏, 가격은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김종춘 모필장
그럼에도 김 모필장은 붓 만드는 일에 대해 “배우러 오는 이가 없다. 배우는 것 자체가 힘들 뿐더러 적자를 면하기 어렵다는 걸 모두가 아는 모양”이라며 씁쓸해했다. 고급 교양이 된 서예·회화 애호가들 사이에선 여전히 김 모필장의 붓을 찾는 이들이 있지만, 일반 수요가 크게 줄어 ‘명장’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을 버틸 이가 없다는 의미다.

울산시 모필장의 전승 계보에 이름을 걸친 이들도 김 모필장의 가족들로 한정된다. 문화재 보유자 아래에는 전수교육사·이수자·전수장학생 등 배분이 있는데 실제 김 모필장의 부인 박금식 씨와 딸 김근애 씨만 전수장학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울산시에 따르면 이들은 2016년부터 5년간 전수장학생만 지냈을 뿐 이수자로는 승급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김 모필장은 문화재 보유자이면서도 자신의 기술을 펼칠 수 있는 ‘사업거리’를 늘 고민한다. 그는 “대학 연구팀과 함께 서예에 쓰이는 먹을 기계적으로 생산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20년 쯤 전부터는 신생아의 배냇머리를 이용해 붓을 만들어주는 소일을 했는데 액자 등을 포함해 한 필당 20만 원 안팎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며 “1980년대에도 붓의 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서예붐이 전국에 불면서 한동안 호황이 이어졌다. 전통은 이어지는 것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볕이 들 것 같지 않은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다만 한평생을 붓 만드는 일에 바친 만큼, 기력이 따를 때까지는 붓 만드는 일을 이어갈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새겨넣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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