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대학원서 북아트·제지 공부
- 세월 자취 묻은 책·지류 등 수선
- 사연 담긴 그림책 등 의뢰 꾸준
- “훼손된 책에 담긴 시간의 흔적
- 그 매력에 매료돼 이 일 택했죠”
대학 시절,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한 권 두 권 사서 읽었다. 처음 몇 권은 세로 2단 편집, 그 다음 몇 권은 가로 편집, 그 다음부터는 출판사가 다르다. 필자가 책을 사는 동안 본문 편집 형태가 바뀌고, 판권이 다른 출판사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높이도 두께도 들쭉날쭉한 상태로 꽂혀 있다. 영 폼이 안 난다. 하지만, 새로 출간된 전집세트로 바꿀 생각은 없다. 필자의 ‘토지’는 차비 아끼느라 걸어 다니고, 점심 굶어가면서 모은 돈으로 책을 사 읽었던 시간의 증명이다. 구입한 날짜와 다 읽은 날짜가 적혀 있고, 밑줄이 그어져 있다. 낯선 토속어는 국어사전을 찾아 뜻을 적어 둔 메모도 있다. 그 책을 어떻게 버린단 말인가. 어떻게 해서든 오래 간직하고야 말 것이다.
재영 책수선 배재영 대표의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을 만났다. 책 수선이라니! 책을 사자마자 마음이 급해 근처 카페로 가서 읽었다. 무너진 책, 그 책의 주인들, 낡은 책을 수선하는 재영 대표의 마음, 파손 형태와 수선된 후의 책 사진…. 이런 책을 쓴 작가라면 무조건 만나고 싶어 연락을 했다. 현재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 바쁘지만 서울까지 가겠다고 하니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재영 책수선 대표를 서울에서 만났다.
■ 낯선 직업, 책 수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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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마포구 연남동 ‘재영 책수선’ 작업실에서 배재영 대표가 책 수선 작업을 하고 있다. |
서울 홍대입구역에서 작업실을 찾아가는 동안 스마트폰의 길 안내를 받았다. 직진, 좌회전, 우회전 하며 성미산로 15길을 찾아갔다. 도착해서 보니, 랜드마크가 될 만한 큰 건물이 없는 주택가였다. 골목길로 접어들어 번지수를 확인했다. ‘재영 책수선’이라는 간판도 잘 안 보인다. 그 과정이 마치 서가에서 책을 찾는 기분이었다. 여기 어디쯤 꽂아두었는데 하면서 제목 하나하나를 짚어가는 그 기분 말이다. 책 표지를 넘기듯 문이 열렸고, 배 대표를 만났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책 수선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난 건 필자로서도 처음이다.
배 대표는 198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순수미술과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2014년 미국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북아트와 제지(Papermaking)를 다시 공부했다. 졸업 후 대학교 내 ‘책 보존 연구실’에 취직해 3년6개월간 일했다. 파손된 책과 희귀서적을 직접 수선하고, 보존방법을 찾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책을 다루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2000여 권의 책을 수선했다고 한다.
2018년 2월부터 서울 연남동에서 ‘재영 책수선’을 운영했다. 150여 권을 수선했고, 25권이 대기 중이며, 현재로서는 공개할 수 없는 프로젝트를 의뢰 받아 작업 중이다. 아쉬운 대로 두꺼운 책의 낡은 겉 표지를 제거하는 작업을 볼 수 있었다. 도무지 벗겨질 기미가 안 보이는 표지에 물칠을 조금씩 하면서 조심스럽게 긁어내는 작업이다. 보는 사람이 답답하다. 저걸 언제 다하나 싶다. 긁어낸 표지 부스러기가 헝겊 보푸라기처럼 책 옆에 조금씩 쌓여갔다. 책 수선이 뭔가 감성적인 일이 아닐까 싶었는데, 고도의 정밀한 과학실험처럼 보였다. 작업 중에는 항상 마스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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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재영 책 수선 / 위즈덤 하우스 / 2021 |
그는 ‘책 보존가’ ‘지류 보존가’라는 정식 명칭 대신 더 많은 가능성을 위해 ‘수선’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수선’이라는 말이 훨씬 정겹게 다가온다. 책 수선이라는 일이 얼마나 낯선지 책 속 한 대목이 말해준다. “사업자등록을 하기 위해 세무서를 찾아갔을 때는 난생 처음 듣는 ‘책 수선’이란 직업 때문에 이걸 어느 업종 코드로 분류해서 등록해야 할지, 과연 예술이냐, 서비스냐, 출판이냐 등등을 놓고서 세무서 직원끼리 작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웃지 못할 상황을 지켜보며 앞으로 내가 이 일을 하면서 감당하고 이해시켜야 할 벽이 어느 정도의 두께인지 막연하면서도 총체적으로 와 닿는 기분이었다. (결국 서비스 업종으로 분류되었다.)” 법이 서비스로 분류했다지만, 필자는 책 수선을 예술의 자리에 놓고 싶다.
■ 책 주인에게는 모든 책이 희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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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책 ‘해리포터’의 수선 전(위쪽)과 후의 사진. 재영 책수선 제공 |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을 읽으면서 그가 하는 작업만큼 궁금했던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들춰보았기에 친구 같은 국어사전, 표지도 속지도 낡을 때로 낡았지만 변함없이 간직하고 싶은 그림책, 대를 이어 물려가며 읽는 성경, 마음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소설과 만화 등의 책. 수 십 년의 세월이 지나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할머니의 일기장, 오랜 세월 함께 책을 읽어 온 책갈피, 곰팡이가 피어버렸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30년 묵은 결혼사진 앨범 등의 지류. 책 속의 사연들마다 감동을 느끼게 한다. 그 하나하나가 주인에게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희귀본이기에 재영 책수선은 섬세한 손길로 최선을 다한다. 그 사연들을 읽는 동안, 기록의 운명을 타고 난 인간은 어쩌면 종이 위의 글과 사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배 대표는 ‘반려책’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그는 서점에서 책을 살 때 일부러 사람들의 손때가 묻고 서서히 파손의 기미를 보이며 가장 위에 놓여있는 책을 고른다. 그의 눈길을 책에서 읽어보자. “나는 책을 수선하기 전에 훼손된 부분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그 모습들을 수집하기 위해 책 수선을 한다고 말할 정도니까. 그 이유는 아마도 축적된 시간의 흔적에 매료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태양빛이, 공기 중의 물방울이, 또 사람의 손끝이 닿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책의 형상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그 인과관계가 만들어내는 모습은 늘 흥미롭다.”
배 대표는 “이 책을 읽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수선해서 간직하고 싶은 책이 한 권씩 떠올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필자의 마음속에도 반려책 제목이 하나 둘 떠올랐다. 아끼는 책을 위한 꿀팁도 챙겼다.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고 핸드크림도 바르지 말고 책을 만질 것! 깨끗한 손이 세심하고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는 최고의 감각이란다.
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