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세자 뒤주에 가둬 죽인 영조
- 혜경궁 홍씨 父子 불화 지켜보며
- 그 애통함·회한 회고록으로 남겨
- “악행 등 세자의 죄는 심신미약 탓
- 왕이 죽음으로 내몬 처분도 응당”
- 법통 바로 세우기 위한 논리 눈길
천륜이라는 부모와 자식 간 사랑이 무너지면 큰 고통과 비극이 따른다. 조선 왕조에서 그런 흉사가 벌어졌다. 임금이 세자를, 아버지가 아들을 굶겨 죽이다니. ‘오죽했으면’인가. 아니면 ‘어떻게 그런 일이’라며 혀를 차야 하나. 눈에 파국이 보이는데 왜 아무도 막지 못했을까. 그 숨 막히는 현장에서 솟아오른 책이 ‘한중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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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4년(영조 20년) 1월 사도세자 빈인 혜경궁 홍씨가 별궁(어의궁)을 출발해 동뢰연(신랑 신부가 술잔을 나누는 잔치)을 치르러 대궐로 가는 장면. 그림 중앙에 빈이 탄 가마가 보이는데 입체로 그려 존엄을 드러냈다. 사도세자가례도감의례 반차도 중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아들 죽인 아버지 영조는 조선 왕 중 가장 오래 살았다. 82년(1694~1776) 생애에서 재위 기간 역시 52년(1724~1776)으로 최장 기록. 아들은 만 27세로 죽었다. 어릴 적 효성과 총명이 뛰어났으나 광증을 앓다 뒤주 속에서 숨진 이선(李愃)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는 덩치도 컸다. 빈 혜경궁(惠慶宮) 풍산 홍씨는 노론 집안에서 자라다가 10세에 간택돼 궁궐에 들었다. 살 떨리는 부자 갈등을 지켜본 세월만 20여 년. 인자한 부모 밑에서 사랑받으며 귀히 자란 혜경궁이기에 그 공포는 남달랐을 터이다. 그것도 어린 나이에 낯선 궁궐 속에서. 아들·손자가 왕이었건만 온몸엔 서리가 내렸다. 칠순에 쓴 ‘한중록(閑中錄)’이 한중록(恨中錄)일 수밖에. 혜경궁은 “보고 겪은 바가 너무 무섭고 끔찍해 죽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거듭 술회한다. 행간에 분노 애통 회한이 이글거린다. ‘한중록’은 무명씨 궁인이 쓴 인현왕후전과 더불어 한글 궁중 기록물을 대표한다. 궁중 여성 중 최고 지존이었던 혜경궁은 무엇을 적었나.
확실히 정사(正史)와는 서술이 다르다. 1771년 2월 영조가 내린 살벌한 ‘궁성호위령’(현대로 치면 위수령)을 들춰보자. 저자는 이 일이 궁궐 야산에서 딴 한낱 밤에서 비롯됐다고 썼다. 보름을 맞아 궁인들이 관례대로 수확물을 궁궐 곳곳에 돌렸다. 혜경궁 아버지 홍봉한이 이 밤을 사도세자 서자인 은언군·은신군에게 갖다줬다. 영조는 이게 못마땅했는지 역모라며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동궁(훗날 정조)이 멀쩡한데 외할아버지가 모반할 까닭이 없다. 이 때문에 홍봉한은 벼슬을 잃는다.
이 고전은 저자가 61~72세(1795~1806년)에 쓴 세 글을 후대가 모아 이뤄졌다. 1부 ‘내 남편 사도세자’, 2부 ‘나의 일생’, 3부 ‘친정을 위한 변명(읍혈록+병인추록)’. 글 쓴 순서는 2부(환갑 때인 정조 19년)→1부(순조 초기)→3부(〃)다. 1부는 어린 순조를 대신해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선 시기에 친정을 변호할 겸 지었다. 혜경궁과 생일이 같은 손자 순조가 ‘뒤주 사건’ 전모를 알고 싶다며 글을 청한 게 더 큰 이유.
사도세자 관련 내용은 당대 금기였다. 영조는 상소문에서 ‘뒤주’를 언급한 선비 한유를 죽였다. 그런 시대였으니 1762년 일어난 변고라 해서 임오화변(壬午禍變), 해당 연도는 모년(某年), 사용한 뒤주는 일물(一物)로 에둘렀다. 시중에는 영조가 무고한 사도세자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게 사실이라면 영조는 죄인이며 후손인 정조·순조도 마찬가지. 왕통 지키기에 저자가 나섰다. 1부에 그 정치 해법이 나온다. ‘부왕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세자는 갈수록 병환이 깊어지면서 여러 악행을 저질렀다. 영조는 종묘와 사직을 위해 아들에게 죄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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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 초상. 얼굴이 갸름하고 눈매가 날카롭고 콧대가 강해 고집스러워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사도세자 초상. 기골이 장대한 모습이다. |
세자가 울화병·광증·강박증을 앓은 이유를 밝히고 여러 죄는 ‘심신 미약’으로 빚어졌다는 논리. 영조는 그에 따라 처분을 내렸으니 영조와 사도세자는 무죄라는 얘기. 정조·순조로 이어지는 법통도 바로 세웠다. 친정도 살려냈다. 영의정인 아버지 홍봉한이 뒤주를 들였다는 시중 소문을 잠재웠다. 혜경궁은 잘라 말한다. “뒤주는 또한 영조께서 스스로 생각하신 것이라.” 1771년 9월 세손이던 정조가 홍봉한에 보낸 편지에서도 같은 증언이 나온 바 혜경궁 발언은 신빙성이 높다. 이뿐 아니라 혜경궁은 셋째 동생 홍낙임을 정순왕후 세력인 정후겸과 억지로 교류하도록 만들었다. 정무 감각이 보통이 아니었다.
3부에선 풍산 홍씨(혜경궁)와 경주 김씨(정순왕후)라는 조선 양대 척실이 치르는 암투와 살육이 적나라하다. 박힌 돌 동궁 외가는 굴러온 돌 임금 외가에 흔들린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던 전후가 정점이었다. 1759년 66세 노인 영조는 첫째 부인 정성왕후가 죽은 뒤 15세 왕비를 맞았다. 경주 김씨인 정순왕후(소론). 그녀는 혜경궁(노론)보다 열 살 어려도 엄연한 시어머니였고 평생 정적이었다. 이들이 조종한 나경언이 사도세자 허물을 고해바친 바람에 결국 뒤주 사건이 터졌다. 세자 사후 2년째인 1764년에는 산 자를 죽은 자의 아들로 삼는 갑신처분(甲申處分)까지 내려진다. 영조가 정조를 효장세자(영조 맏아들로 10세에 죽었다) 양아들로 둔 일이다. 저자는 정순왕후 측이 자기에게서 보호막을 제거하려 벌인 해코지라고 봤다. 결국 1786년 정조는 혜경궁이 천하 원수로 여겼던 정순왕후 오빠 김귀주를 유배 보내 죽였다. 정순왕후는 앙갚음한다. 순조 수렴청정 시기인 1801년, 혜경궁 남동생 홍낙임은 제주로 귀양 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정순왕후는 3년여 수렴청정이 끝난 1년여 뒤 1805년 1월 눈을 감았다.
저자는 남편을 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 사당 이름)으로 불렀다. 이 고전 첫 문장이 직격탄이다. “1762년 경모궁 죽음은 천고에 없는 변이라.” 아들을 죽여 죗값을 물었던 아버지인지라 영조가 내린 시호는 사도(思悼), 단 두 자. 세자 죄가 무거웠다. 폭언 폭행 오입 실화(失火) 자살미수 살인들뿐 아니라 영조를 향한 쌍욕, 역모로 의심받을 만한 평양 잠행…. 세자는 은전군을 낳은 후궁(빙애)을 때려죽였다. 혜경궁에게 바둑판을 던져 심한 상처를 입혔다.
그는 희귀한 강박증인 의대증(衣帶症)을 앓았다. 부왕을 뵈려면 옷을 갖춰 입어야 하는데 새 비단옷 20, 30벌을 지어 바쳐도 못 입었다. 옷이 피부에 스치면 발광해 시종에게 칼을 휘둘렀다. 이를 두고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는 “부왕을 극도로 무서워하면서 피부가 예민해져 생긴 현상이다. 당대인은 그 병을 이해하지 못했을 터이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는 땅을 관 형태로 파서 들어가 눕는 기행까지 보였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성격이 아주 달랐다. 부왕은 화를 잘 내고, 언행이 재빨랐으며, 불호가 뚜렷한 성품이었다. 영조는 태어난 지 100일 되는 세자를 품지 않고 외진 동궁전에 보내 경종 나인들 손에 맡긴 후 자주 찾지도 않았다. 저자는 총명하고 의젓했던 세자였건만 열 살이 됐을 때 또래 아이에게 볼 수 없는 이상 증상이 생겼다고 썼다. 세자는 우직해 언행이 느리고 부왕이 잘못을 추궁하면 변명할 줄 몰랐다. 아버지는 아들이 성에 차지 않았고, 아들은 닦달하는 아버지를 겁냈다.
영조는 세자가 국왕 수업할 때 좋은 자리에는 안 데려가고 모질거나 귀찮은 업무를 맡겼다. 세자(20세)를 처음 능행에 데려갔을 때였다. 한양을 막 벗어나자 폭우가 쏟아졌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네 탓이다”며 묘소 입구에서 홀로 되돌려보냈다. 이랬으니 상심한 세자는 자결하려하거나 신하들이 보는데도 우물에 뛰어들었다. 갈수록 정신이 피폐해져 장검을 가까이 두고, 도술 서적을 즐겨 읽다가 헛것까지 본다. 영조도 죽음을 넘나들며 어렵게 왕위에 올랐다. 조울증 과대망상 같은 질환을 앓았는지 모른다. 이런 부자가 사는 궁궐은 생지옥 같았을 터이다.
‘한중록’에 나타나는 조선을 갉아먹는 정치인들이 더는 이 땅에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람이 하는 일에 사랑이 없으면 늘 사달이 났다. 겹겹 둘러싸인 궁궐 담처럼 영조와 사도세자 간 벽은 끝내 허물어지지 않았다. 부자가 따뜻한 공감을 나눴다면 조선 후기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세상 이치가 번성하였다가 쇠하고, 화를 입었다가 다시 복을 얻는 법이니 바퀴 돌듯하는지라.” 소박한 삶이 지존이 누리는 부귀보다 낫다는 혜경궁 마지막 말이 그나마 독자에게 위로를 전한다. 서평가·세상관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