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전다형의 시 둘레길 <6> 담양 식영정 면앙정

식영정에 깃든 정철 시앓이… 면앙정엔 송순 10년 퇴고의 발자취

  • 전다형 시민기자
  •  |   입력 : 2021-09-02 19:11:51
  •  |   본지 12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 ‘성산별곡’ 식영정 사계절 등 노래
- 성현 지조 배운 정철의 심상 절절
- ‘면앙정가’ 한글로 풍류생활 읊어

- 삶을 통과하지 않는 시는 ‘가짜’
- 허물 벗고 거듭나기로 마음먹어

여행은 욕망에 걸친 사다리를 수평으로 눕혀주기도, 징검다리와 건널목을 선물하기도 한다. ‘시 둘레길’을 찾아 가사문학의 산실 담양으로 떠났다. 내 성(姓) 전가(田哥)의 본(本)이 있는 담양으로 가는 길은 멀었지만, 지치지 않았다. 하동 함양 광양 들판을 끌고 달리는 차 창밖 무논에는 시퍼런 벼가 가족을 늘리고, 산비탈 과수원에는 제철 과일이 주렁주렁 과즙을 쟁였다.

사계절 중 여름은 중년이며, 몸의 허리쯤이다. 중년이 가족을 위해 쉼 없이 혼신을 다해 일하는 모습은 여름과 닮았다. 몸 곳곳에 피를 나르는 동맥과 정맥이라는 생각, 나무뿌리에서 우듬지까지 쿵쾅쿵쾅 물통을 들고 이어달리기를 하는 물관부·체관부라는 생각, 오만 생각을 했다. 울창울창, 푸름푸름 번지는 녹음을 본다. 평등하게 햇살을 입에 물린 자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새끼 키우는 어미의 마음이 된다.

무상으로 나눠주는 이 햇살 거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입추 지나고 아침저녁 찬바람이 분다. 땡볕에 따글따글 고추 말리며 어머니께서 하시던 ‘다 한때가 있다’는 말씀, 그 한때는 호시절 젊음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가을을 준비하는 들판과 녹음 우거진 산야를 바라보는 내 눈은 벌써 기쁜 슬픔으로 글썽거렸다. 얼마 있지 않으면 알곡을 거두고 벼를 벤 논에 다시 돋아난 새싹을 보게 될 것이다. ‘낡음’ ‘늙음’ ‘익음’을 생의 저울대에 올려본다. 그러는 사이 목적지에 다다랐다.
   
전남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 식영정에서 소담하고 차분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원래 남면(南面)이던 이곳 명칭은 가사문학의 산실임을 기념하고 알리고자 2019년 ‘가사문학면’으로 바뀌었다.
■ 청산별곡 : 식영정 툇마루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은 정치인이자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가사 4편과 시조 107수를 남긴 시인이다. 여우비가 내렸다. 400년 전 시인 정철을 만나러 식영정으로 향했다. 식영정을 향해 오르는 계단 아래 ‘성산별곡’ 전문이 적힌 시비가 비에 젖고 있었다. 시비를 더듬더듬 읽었다.



山中(산중)의 벗이 업서 漢紀(한기)랄사하 두고 :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놓고

萬古(만고) 人物(인물)을 거사리 헤여 하니 : 만고의 인물을 거슬러 세어보니

聖賢(성현)도 만커니와 豪傑(호걸)도 하도 할샤 :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날 삼기실 제 곳 無心(무심)할가마난 : 하늘이 인간을 지으실 때 무심하랴마는

엇다 한 時運(시운)이 일락배락 하얏난고 ; 어찌된 시운이 흥했다 망했다 하였는가.

모랄 일도 하거니와 애달옴도 그지업다 :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픔도 끝이 없다.

箕山(기산)의 늘근 고불 귀난 엇디 싯돗던고 : 기산의 늙은 고불(노인 허유) 귀는 어찌 씻었던가.

박소릿 핀계하고 조장이 가장 놉다 : 표주박 소리도 귀찮다 핑계하고 버린 조장(지조)이 가장 높다.

人心(인심)이 낫 갓타야 보도록 새롭거날 : 인심이 얼굴 같아서 볼수록 새롭거늘

世事(세사)난 구롬이라 머흐도 머흘시고 : 세상 일은 구름과 같아서 험하기도 험하구나.(정철 ‘성산별곡’ 결사 일부)



   
식영정 ‘송강 정철 가사의 터’ 기념비.
‘성산별곡’은 정철이 식영정 주인인 정철의 처 외재당숙 김성원의 멋과 풍류를 흠모한 내용과 석영정의 사계절을 노래한다. 식영정에 올라 400년 아름드리 노거수 몸 트림을 통해 정철의 요동치는 마음 부림을 느낄 수 있었다. 내게도 손에 잡히지 않던 시를 찾아 헤매던 시간이 있었다. 밤잠을 설치고 혓바닥에 바늘이 돋아 물을 못 넘기던 시앓이가 떠올랐다. 식영정에서 시의 스승을 생각했다. 삶의 철자법과 시의 고저와 장단을 짚어준 스승이 많다. 세상에 먼저 나온 시집과 모든 시인이 내 스승이다. 세상 사물과 꽃 나비와 오물 쓰레기도 다 시 스승이다.

‘성산별곡’ 결사에서 정철의 심상이 드러난다. 정철은 쌓아둔 책을 읽으며 한 세상, 인간 삶을 비춰보았다. 세상 시끄러운 이야기를 들은 귀마저 씻어냈다는 “기산의 늙은 노인 허유”를 빗대어 지조를 말한다.

“서책을 쌓아 두고 옛 시대의 인물”, 성현과 영웅의 지조·절개를 배우려 한 것 같다. 독서만 한 거름은 없다. “세상 일이 구름과 같아” 언제 어떻게 변할지, 한 치 앞 내다볼 수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정철은 ‘성산별곡’에서 “어찌하여 시운이 일락배락 하는가?”라고 ‘기산 영수의 고사’를 언급하며, 을사사화를 겪고 낙향한 아버지를 보며 맺힌 시름과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펼치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한 듯하다.

   
담양군 봉산면 면앙정로의 면앙정이다. 지명들이 예사롭지 않다.
■ 송순을 만나다 : 면앙정

“人間(인간)알 쎄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업다: 인간 세상을 떠나와도 내 몸이 한가로울 겨를이 없다.

니것도 보려 하고 져것도 드르려코: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혀려 하고 달도 마즈려코: 바람도 쏘이려 하고, 달도 맞으려고 하니,

밤으란 언제 줍고 고기란 언제 낙고: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으며,

柴扉(시비)란 뉘 다드며 딘 곳츠란 뉘 쓸려뇨: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 것인가

아참이 낫브거니 나조회라 슬흘소냐: 아침나절 시간이 부족한데 저녁이라고 싫을소냐

오날리 不足(부족)거니 來日(내일)리라 有餘(유여)하랴: 오늘도 시간이 부족한데 내일이라고 넉넉하랴

이 뫼회 안자 보고 뎌 뫼회 거러 보니: 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에 걸어 보니

煩勞(번로)한 마암의 바릴 일리 아조 업다: 번거로운 마음이면서도 아름다운 자연은 버릴 것이 전혀 없다. (송순 ‘면앙정가’ 결구 일부)



면앙 송순(宋純, 1519~1582)은 말년에 담양 제월봉 아래 면앙정(면仰亭)을 짓고 여러 문인과 교류하며, “내려다보면 땅이, 우러러보면 하늘이, 그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풍월 산천 속에서 한 백 년 살고자”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탄생한 ‘면앙정가’는 그 때 풍류 생활을 읊은 은일가사(隱逸歌詞)다. 초입구와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결구로 이뤄졌다. 송순이 뜨거운 여름과 같이 세상에 맞섰던 중년을 뒤로하고 낙향한 후, 인생의 갈무리를 읊은 이 시는 십 여 년 퇴고 끝에 얻은 각고집(刻苦集)이라 할 수 있다. 위 시는 중국의 시선(詩仙)인 이백과 악양루를 언급한다. 그러나 “한 편의 시를 삼천 번 퇴고를 하니 조사 한 글자도 남지 않았다”는 시성(詩聖) 두보의 일화 또한 떠올랐다. 이 ‘면앙정가’를 완성하기까지 십 년간 면앙정을 오르내렸을 송순을 생각했다.

   
내 주변에도 송순과 같이 케렌시아(Querencia·피난처 안식처)와 맨 케이브(Man Cave)를 마련한 시우들이 있다. ‘면앙정가’에서 나타난 송순의 삶을 보며, 내 시(詩)살이를 짚어보았다. 나만의 시작(詩作) 공간을 갖고 싶다며 노래만 했을 뿐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편안한 도시의 삶을 버리고 자연을 벗 삼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주변으로 밀려난다는 두려움, 내려놓지 못한 내 욕망 탓이다. 시는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삶을 통과하지 않는 시는 가짜다. 흐드러지게 핀 백일홍의 몸피처럼 스스로 내 허물을 벗고 여린 새살로 거듭나 세상 온도를 견디리라 마음먹었다.

시민기자·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축제 때도 도개 못 한 영도대교…한 달째 원인불명
  2. 2레이예스 맑음…이이무라 흐림…‘로·비’ 안갯속
  3. 346년 감속기 외길…ICT 입힌 액추에이터 개발 성공
  4. 4청년도 “국제신문 지키자”…대학가로 지지 확산
  5. 5반려견 비비탄 학대 20대들 징역 8개월(종합)
  6. 6“끝내 알 수 없었던 어머니 마음…그 알 수 없음이 인간이죠”
  7. 7김민석 “신천지 與 입당 증거 없다” 사과(종합)
  8. 8국회의원 112명 서명…원내 주요 5개 정당 동참
  9. 9“북항개발 市-BPA 방향 같아…돔 아레나 규모 등 협의할 것”
  10. 10부산 매출액 돛 달아준 ‘해운 빅3’…6년 만에 전국 기준 100대 기업도(종합)
  1. 1김민석 “신천지 與 입당 증거 없다” 사과(종합)
  2. 2국회의원 112명 서명…원내 주요 5개 정당 동참
  3. 3李 “집값 놀라울 정도로 하락…통계 제대로 알려야”
  4. 4정계 “지역언론 독립·공공성 훼손없게 계속 관심을”
  5. 5국힘 신임 부산행복연구원장에 오경은 전 구의원
  6. 6시의회 상임위 제한 폐지 논란일자 결국 심사 보류
  7. 7美 중간선거 시작, 우주서도 투표는 계속된다
  8. 8與주도로 조작기소 특검법안 법사위 상정…국힘 반발·퇴장
  9. 9정파·지역도 초월…‘국제신문 회생’ 국회 팔 걷었다
  10. 10“지방주도 성장 33조 투자…공공기관 이전 내년 착수”
  1. 146년 감속기 외길…ICT 입힌 액추에이터 개발 성공
  2. 2부산 매출액 돛 달아준 ‘해운 빅3’…6년 만에 전국 기준 100대 기업도(종합)
  3. 3“부산 해양수도·북극항로 육성, 선원 역할 중요”
  4. 4한진칼 주식 더 사는 조원태…호반과 지분경쟁 2R
  5. 52050년 중간저장시설·2060년 영구시설…정부, 방폐물 관리 3차 계획안 여론 수렴
  6. 6[증시와이드] 불확실성 커진 증시…우량주 중심 냉정한 대응을
  7. 7석유류·공업제품값 ‘고공 행진’ 지속…부산 10월 물가상승 4개월만에 최고(종합)
  8. 8‘반도체 소부장’ 원익 공채에 1만2000명 몰려
  9. 9한양증권도 털렸다…고객·임직원 정보 일부 유출
  10. 10"가덕도신공항 올해 예산집행률 고작 0.03%…정상화 시급"
  1. 1축제 때도 도개 못 한 영도대교…한 달째 원인불명
  2. 2청년도 “국제신문 지키자”…대학가로 지지 확산
  3. 3반려견 비비탄 학대 20대들 징역 8개월(종합)
  4. 4“북항개발 市-BPA 방향 같아…돔 아레나 규모 등 협의할 것”
  5. 5에코델타에 유치원·초·고교 추가 신설
  6. 6첫 공소청 수장 후보, 이정현·박철우·예세민 물망(종합)
  7. 7수능 ‘AI 안경 커닝’ 막는다지만…전문 탐지기 없어 실효성 의문(종합)
  8. 8해군 3600t급 디젤잠수함 ‘서희함’ 진수
  9. 9141개 시민단체도 노동계도 ‘국제신문 회생’ 인가 촉구
  10. 10면세유 23억 원어치 빼돌린 유통업자 집유
  1. 1레이예스 맑음…이이무라 흐림…‘로·비’ 안갯속
  2. 22027 아시안컵 내년 12월로 연기…차기 감독 선임 여유
  3. 3KLPGA 상금왕·대상 놓고 ‘림-솔(서교림·김민솔) 대전’
  4. 4MLB 애틀랜타 김하성, 퀄리파잉 오퍼 못 받아
  5. 5박항서 향해 “김치맨”…태국 관중들 인종차별
  6. 6김지율, 고교 최동원상 수상…부산고 하현승 아쉽게 고배
  7. 7BNK 개막전 첫 승…두터워진 선수층 빛났다
  8. 8[뭐라노] 롯데가 스마트 야구를?
  9. 9체력 비축한 마법사, 타선 폭발한 사자…누가 웃을까
  10. 10동의과학대학교,‘제1회 부산지역 전문대학 유학생 축구대회’ 준우승
우리은행
얼굴에 담긴 이야기
자연에는 길흉이 없다
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여수 ‘돌산 갓김치’와 갓김치 음식
궁리와 시도 [전체보기]
노동 운동부터 계엄까지…예술로 사회문제 비추다
비바람 견뎌낸 그의 회화…마침내 ‘고정관념 감옥’서 해방
김민우의 인서트 [전체보기]
비밀이 사라진 섬, 농담으로 건네는 회한
응원하고 함께하는 마음
문화레시피 [전체보기]
‘부산 커넥티드’…9.5 대 1 뚫은 신인 작가 10팀 한자리
‘부산 발레’ 낙동강 타고 새 물길 열다
박현주의 신간돋보기 [전체보기]
아이마다 다르게 자라는 이유 外
실크로드 연구자이자 간첩 ‘깐수’ 外
박현주의 책 이야기 [전체보기]
노력과 성공은 비례하는가…현대사회 씁쓸한 이면
히말라야 빙하 붕괴로 대참사…더 심각해진 기후 재난
아침의 갤러리 [전체보기]
장 마리 해슬리-Gymnopedies(짐노페디)
배미정-나무에 기대어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곰 두 마리 /황인숙
시간이 지나고 보니 /설상수
주말 영화 박스오피스 [전체보기]
누적 250만 넘은 ‘치이카와’ 4주째 1위…브래드 피트 ‘하트 오브 비스트’ 2위
‘치이카와’ 3주째 정상…관객 200만 돌파 올해 열 번째 영화
오늘의 운세- [전체보기]
오늘의 운세- 2026년 11월 4일 (음 9월 25일)
오늘의 운세- 2026년 11월 3일 (음 9월 24일)
오늘의 BIFF [전체보기]
오늘의 BIFF- 2026년 10월 14일
오늘의 BIFF- 2026년 10월 13일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전체보기]
깊어가는 가을에 밤하늘 별을 읊은 이덕무의 시
조선 중기 문신 김인후가 소쇄원 단풍을 읊은 시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