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리아스’ 전쟁 막판 49일 기록
- 아들 시신 찾으려 무릎 꿇은 왕
- 눈물 흘리며 허락한 아킬레우스
- 전쟁은 가장 어리석은 짓 교훈
- ‘오디세이아’ 오디세우스 귀향담
- 온갖 시련 끝 가족과 극적 재회
- 최고 미인神 선발전 등 흥미진진
- 인간 희로애락 고대·현대 흡사
잘 읽히지 않는 고전 중 하나지만, 귀에 익숙한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트로이(Troy). 팝송 좋아하는 5060세대라면 네덜란드 여성 3인조 보컬그룹 루브가 불렀던 ‘트로이 목마’가 떠오른다. 금발을 휘날리며 칼을 휘두르는 브래드 피트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2004년 국내 개봉한 워너브러더스 영화 ‘트로이’에서 그는 아킬레우스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그가 주연이었듯 이 고전에서 아킬레우스는 최고 영웅. 컴퓨터 정상 프로그램을 위장한 악성 바이러스에 ‘트로이 목마’란 이름이 붙었다. 적절한 작명이다. 오디세우스가 고안한 이 위장 목마 때문에 트로이가 함락됐다고 이 고전은 전하니까. 그 속에서 쏟아져나온 건 바이러스 아닌 그리스군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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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군 최고 용장인 아킬레우스가 트로이군 맹장 헥토르를 죽인 뒤 발가벗겨 전차에 매달아 끌고 다니며 능욕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화가 프란츠 마슈(1861~1942) 작. |
“노래하라 노여움을, 시의 여신이여.” 일리아스 첫 문장. 노여워하는 인물은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이다. 적진을 코앞에 두고 그들이 벌이는 갈등이 서두에 놓였다. 곧 청동 갑옷이 덜거덕대는 소음, 전차가 질주할 때 수레바퀴에서 나는 마찰음이 시모에이스강과 크산토스강 사이 평원에 가득 울려 퍼진다. 물푸레나무 자루에 박힌 청동 창이 적군 머리통을 꿰뚫자 뇌수가 흙먼지 속으로 흩어진다. 묵직한 청동 칼이 상대 투구를 내리치자 푸른 불꽃이 인다.
인간과 인간, 신과 인간, 신과 신이 싸우고 화해하는 얘기인 이 고전은 기원전 8세기 중·후반께 쓰였다. 일리아스(일리아드)는 ‘일리오스 이야기’란 뜻. 현재 터키를 옛날엔 일리오스라 불렀다. 오디세이아(오디세이)는 일리아스 2탄으로 ‘오디세우스(율리시스)의 노래’. ‘일리아스’에 등장했던 그리스 영웅 중 한 명인 오디세우스(율리시스)가 주인공이다. 그는 트로이전쟁이 끝난 뒤 곧장 고향 이타케로 못 갔다. 10년간 방랑하며 여러 모험을 겪는다. 귀향 후 가문을 되찾는 과정 역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일리아스’(24권 1만5693행) ‘오디세이아’(24권 1만2110행)는 서사시. 서구 문학상 최초이자 가장 길다. 그리스어 알파벳 24자를 첫 자로 사용하는 권별법(券別法)에 따라 책을 썼다. 10년간 벌어진 트로이전쟁 중 일부만 다뤘다. ‘일리아스’는 트로이가 함락되기 직전 49일간이다. ‘오디세이아’는 귀향 전 41일간 모험담. 호메로스(호머)는 가장 급박한 시기를 잡아채 서사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렸다. 트로이 얘기는 유물 발굴을 통해 일부가 사실(史實)로 확인됐다. 관련 유적을 1870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처음으로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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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북동구 쪽인 헬레스폰트해협 히사틀리크 구릉에서 발견된 트로이 성곽 유적. |
저자 호메로스는 실존 여부조차 불명하다. 기원전 800~700년 활동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그가 후속작 ‘오디세이아’를 저술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두 고전을 견줘보면 각각 쓴 단어나 어투가 자못 다르다. 작품 간 50~100년 시대 격차도 영향을 줬다. 이런저런 흠집에도 걸작. 입·기억으로 명맥을 어렵사리 잇던 그리스신화·전설을 문자로 정착시켜 영원한 인류 자산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리아스’는 전쟁이야말로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는 값진 교훈을 전한다. 생사 앞에 선 작은 인간, 신들에게 꼭두각시다. 그런 인간이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여러 장면이 가슴을 데운다. 호메로스는 삶과 죽음을 통찰한 대시인이었다. 고대 그리스인은 죽음을 인간 한계가 아닌, 신은 못 누리는 고상한 덕목으로 보았다. 아귀인 양 싸우기만 하는 인간, 남긴 게 무엇일까. ‘일리아스’ 마지막 대목으로 가보자.
바야흐로 전쟁은 막바지. 헥토르는 트로이군 총대장이자 프리아모스 왕의 맏아들이다. 그리스군 용장 아킬레우스는 벗 파트로클로스를 무척 아꼈다. 그런 그를 헥토르가 처참하게 죽인다. 이를 갈던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여 복수를 이룬 후 나체 시신을 끌고 다니며 욕보인다. 늙은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은 이를 보고 통곡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신의 도움을 받아 적진을 찾았다. 아킬레우스를 만난 그는 아들 시신을 돌려 달라며 무릎을 꿇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두 사람, 부정과 우정은 그 슬픔을 이해한다. 두 적장이 서로 붙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일리아스’ 하이라이트다. 고결한 성품을 찬양했던 호메로스는 그걸 아킬레우스에게 심어줬다. 아들 시신을 넘겨받아 돌아온 프리아모스 왕은 장례를 치른다. ‘일리아스’ 마지막 장면이다. 방패와 창이 부딪치며 내는 무시무시한 쇳소리가 점차 잦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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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디세우스 일행이 외눈박이 거인 키클로페스를 눈멀게 한 뒤 배를 타고 탈출하자 거인이 쫓아와 바위를 던지고 있다. 스위스 화가 아놀드 뵈클린(1827~1901) 작. |
“그 용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소서, 뮤즈 여신이여.” ‘오디세이아’ 서두다. 용사란 트로이군을 쩔쩔매게 했던 ‘꾀돌이’ 오디세우스. 늑대 여우 돼지를 합한 듯한 이 용사는 이제 무사 귀향만을 갈구하는 남편이자 아버지일 뿐. 호메로스는 ‘참을성 많은 오디세우스’란 표현을 자주 쓰면서 그 앞에 열린 고생길과 반전을 예고한다.
전작 ‘일리아스’에서 못 한 여러 얘기가 ‘오디세이아’에서 하나씩 밝혀진다. 오디세우스 진술이나 회고, 음유 시인이 부르는 노래를 통해서다. 오디세우스가 10년간 집에 가지도 못한 건 그가 트로이 출항 때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아 노여움을 샀기 때문. 그는 식인 외눈박이 거인 키클로페스에게 잡힌다. 거인 눈을 멀게 해 겨우 탈출했는데 하필 키클로페스 아버지가 포세이돈. 오디세우스 시련은 가중된다.
아내 페넬로페를 괴롭히고 재산을 축내 온 구혼자들을 오디세우스, 아들 텔레마코스, 두 하인이 합심해 도륙한다. 당한 가문 쪽에서 무기를 드니 다시 피바람이 불기 직전. 호메로스는 이런 복수의 고리를 끊는다. 택한 카드는 아테네 여신이 중재한 화해다. ‘일리아스’ 마지막에서 타올랐던 대주제, 꺼뜨릴 수 없는 인간애 불꽃을 다시 피워올려 보이며 막을 내린다.
독자는 고대 그리스를 여행한다. 그때는 암소나 양을 잡아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의례가 상세히 나온다. 살점이 붙은 다리뼈를 그을려 낸 냄새를 신을 향해 날려 보내고 고깃살을 나눠 먹었다. 인간이 신에게 대드는 장면이 볼거리다. 올림포스 열두 신은 인간과 얽힌 인연이 많아 참전이 불가피하다. ‘최고 미인 여신 선발전’이 전초전. 여기서 아프로디테-헤라·아테네로 편이 갈린다. 아프로디테가 미모 경쟁에서 아테네와 헤라를 이겼다. 아킬레우스 어머니인 바다 여신 테티스는 그리스군 편이다. 트로이인 제관을 둔 아폴론은 그리스군을 괴롭힌다. 아폴론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쏜 화살을 아킬레우스 급소인 발뒤꿈치에 꽂히게 해 그를 죽인다.
후반에서 드러나는 놀라운 사실. 제우스가 이 모든 걸 기획했다! 트로이 패망을 정해놓고 전쟁을 몰고 갔다. 제우스는 테티스를 좋아했지만, 둘 사이에 난 아들이 자신을 죽인다는 신탁을 피하려 그녀와 인간 펠리우스를 결혼시킨다. 그 혼례에 초대받지 못해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뿔이 났다. ‘최고 미모 여신에게’라고 쓴 황금사과를 식장에 던지자 앞에서 말한 세 여신이 걸려든다. 트로이전쟁 유발범 파리스는 밀약한 대로 아프로디테를 지목하고 그 대가로 스파르타 왕비 헬레나(제우스 딸)를 유혹해 데려간다. 오쟁이 진 메넬라오스 왕은 형 아가멤논을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에 앉히고 10만 명 1000척으로 출정한다. 트로이전쟁이 시작됐다.
인간이 희로애락을 겪어내야 하는 운명은 고대나 현대나 변치 않았다. 두 고전 속 주인공을 만나보면 그리 낯설지 않다. 온갖 풍파를 헤치고 귀향하는 오디세우스가 그렇다. 오늘도 수많은 남녀 오디세우스가 힘든 하루를 끝내고 고단한 몸을 누일 곳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서평가·세상관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