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MBC는 시대극 ‘여명의 눈동자’부터 트렌디 드라마 ‘질투’까지 성공시키며 드라마 왕국으로 자리 잡게 된다. 대대적인 물량공세를 벌이며 창사특집을 준비하던 SBS와 작품별 대중적 호응도의 편차가 컸던 KBS를 따돌리고 파죽지세의 흥행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를 계기로 MBC는 해외로 눈을 돌려 현지 로케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1992년 방영된 ‘억새바람’은 방송사 최초 이민 1.5세대를 다룬 이야기였다. 미국 LA에서 벌어진 흑인 폭동 사태 당시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백인 경찰들에 대한 불만이 한인 사회로 옮겨붙으며 교민들은 많은 피해를 보았고 LA 폭동은 ‘억새바람’의 배경이 되었다.
방영한 지 벌써 30년이 된 드라마라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억새바람’은 당시 주말 멜로극의 반복되던 소재를 벗어난 신선한 시도였다. 이민 가정의 두 아들로 나온 손지창과 윤동환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서울대 종교학과 출신의 21기 공채 신인이던 윤동환은 섬세한 내면 연기로 주목받았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 형과 달리 말썽만 피우던 동생 역을 맡아 훗날 ‘마지막 승부’로 청춘스타가 된 손지창의 풋풋한 연기와 부모 세대 이영하 김미숙, 가치관의 차이로 갈등을 겪는 또 다른 커플 하희라 임성민 등 당시 톱 배우들의 열연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 청춘이던 배우들은 세상을 등지기도 했고 귓가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초로에 접어들었다.
거센 바람에도 다시 일어나는 억새의 강인한 모습을 그린 ‘억새바람’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미나리’를 떠올리게 한다.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떠나갔던, 한국에서 교사라는 인텔리 직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미국 사회에서 하층민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한인 1세대, 그리고 그들을 따라갔던 어린 나이의 자식들은 이제 완전히 미국인이 된 자녀를 둔 부모가 되었다. 어디에서나 푸릇하게 잘 자라나는 미나리와 절대 눕지 않고 일어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 억새가 일구어낸 또 다른 삶의 여정…. 30년 전, 바다 건너 먼 땅에서 버티는 삶을 살아냈던 그들의 드라마가 갈색빛 필름처럼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경성대 글로컬문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