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 정신 담긴 48권 목민심서
- 18년간 귀양서 본 민심·치민
- 백성 눈높이서 치열하게 묘사
- 선정 칭찬, 악질 수령은 꾸짖어
- 참된 관리의 자세 상세히 서술
- 조선 말 부패한 나라 혁파 포부
- 정조 급서하자 유배당해 좌절
- 정적들, 복귀 막고 업적 폄훼
사례 1. 조선 문신인 삼산(三山) 유정원(柳正源 1703~1761)은 자인(현재 경북 경산) 현감을 지낸 뒤 고향인 경북 안동으로 돌아왔다. 전임지에서 사용했던 헌 농짝도 도착했다.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했던 동네 아낙들이 모여들었다. 열어보니 짚만 가득. 부친 이임을 마무리한 아들이 속 빈 농짝을 부치면서 부서질까 봐 짚을 채워 넣었다. 실상을 알게 된 아낙들이 크게 웃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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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다산초당(사적 107호)은 글자 그대로 초가였는데 1937년 무너진 후 1957년 목조 기와지붕으로 고쳐 지었다. |
사례 2. 다산이 유배지 전남 강진에 살 때다. 책을 수만 권 실은 중국 배가 표류하다가 무장(현재 전북 고창) 해안에 닿았다. 당시 조선 법은 표류선 내 모든 책을 초록해 보고토록 했다. 지역 벼슬아치들은 “작은 새가 흙을 물어 날라서 바다를 메우는 격”이라며 책들을 모래밭에 몽땅 파묻었다. 표류선 중국인들이 원통해 땅을 쳤다.
사례 3. “수령·아전들이 겨울철 곡식 걷기, 새봄 환곡 지급을 속이는 짓이 번질이다. 황주에선 목사와 절도사가 이런 농간으로 생긴 돈을 나눠 먹으며 당연하게 여긴다.” 번질은 지방 아전이 환곡을 빼돌린 후 거짓 문서를 꾸미는 짓거리.
48권 16책 목민심서(牧民心書 1821년)엔 선정을 펼치는 조선 목민관은 칭찬하고, 악질 수령과 수하를 꾸짖는 다산 목소리가 생생하다. 그들이 어떻게 백성을 보살폈는지, 등골을 얼마나 빼먹었는지를 치열하게 묘사했다.
21세기 목민관, 지역 공무원은 어떨까. 지난해 여름, 코로나 사태에 물난리가 겹쳤다. 전국 지자체에서 시민이 큰 고통을 겪었다. 부산에선 지하 차도 참사와 관련해 고위 공무원이 법 심판을 받았다. 멀쩡한 빗물저장소를 가동하지 않았던 구청 관계자는 책임을 졌다. 전국에서 수해 위험 지역 가옥이 부서지는 사례는 부지기수. 그들은 올해엔 제대로 대비할까? 다산은 재난 속성을 꿰뚫어 보고 지침을 마련했다. “저지대 수해 위험 민가는 평상시에 옮기고, 이동이 어려우면 배라도 준비하라. 재난 예방이 재난을 당한 후 은혜 베풂보다 낫다.” 조선 후기엔 독감 화재 물난리 산사태 같은 재난에 몸을 던져 대응한 수령이 적잖았다.
다산은 어릴 때부터 현감·군수·도호부사·목사를 지낸 부친(정재원)을 따라다니며 관리 실상을 관찰해 왔다. 대과 급제 후 내직 벼슬이 병조참의에 이르기 전, 경기 암행어사와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 같은 외직을 거치면서 현장을 누볐다. 18년간 귀양을 살면서 민심과 치민(治民) 실태를 백성 눈높이에서 듣고 보았다. 그 결과를 경서와 고대 문헌을 펼쳐 고증한 후 써낸 책이 ‘목민심서’.
목민은 ‘백성을 부양한다’, 심서는 ‘마음을 담은 책’이란 뜻. 다산이 현직 관리가 아닐 때 이 책을 지어서 서명(書名)이 에둘렀다. 끝내 조정이 불러 주지 않아 못 이룬 경세제민 소망을 향한 아쉬움이 책 제목에 아련하게 배었다. 당대 수령과 후대 관리가 선정을 이뤄주길 바라는 안타까운 다산 마음이 행간을 흘러간다. 이 고전은 좁게는 조선 시대 지역 수장인 수령에 필요한 업무 지침서, 넓게는 조선 염량세태를 까발린 보고서. 수령이란 단어를 공무원 정치인 직장인으로 각각 바꿔 읽어 본다. ‘그렇지’ 하며 무릎을 치게 될 터. 숱한 한국 CEO가 다산학 강의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다산 사상이 애민 즉 사람[人]에 근원을 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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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판은 추사 김정희 글씨를 집자해 달았다. |
정약용이 이룬 넓고 깊은 인문학을 ‘다산학’이라 부른다. 다산은 조선 말기에 집단 지성 체계를 활용한 선각자였다. 저술 총량이 182책 503권. 다산이 아무리 천재라도 혼자 이루기엔 벅찬 규모다. 그는 18명 제자를 모아 분업 연구했다. 1801년 귀양 가는 다산은 곤장 맞아 아픈 몸을 끌고 강진에 닿았다. 죄인이라며 인심은 차갑다. 동문 밖 주막에 겨우 육신을 뉘었다. 이곳 거처를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짓고 4년여 학동을 가르치며 집필을 시작했다. 고성사 보은산방과 제자(이학래) 집에서 7년간 묵었다. 1808년 봄 외가가 마련해준 만덕산 기슭 목조 초가에 들어 유배가 풀린 1818년 9월까지 10년을 보냈다. 다산 모친인 해남 윤씨는 강진이 고향. 고산 윤선도(1587~1671)가 부친이다. 이 가문은 600년 고택인 해남 녹우당(사적 167호)에 조선 최대 사설 도서관인 만권당을 두었다. 다산은 이곳 장서 1000여 권을 초당으로 져 날라 쌓아 두고 저술했다. ‘목민심서’ 속 중국 24 정사(正史)와 우리 역사 속 충신과 명석한 관리, 충직한 무관, 탐관오리, 순박한 백성 얘기는 읽는 이를 울리고 웃긴다. 지역 유지인 외가가 다산을 도왔고, 유배를 감시하는 눈길도 느슨해 그는 강진 유배를 잘 넘겼다. 관직은 뺏겼지만, 청사에 남는 책을 남겼으니 그에게 만권당은 행운이었다. 동서고금 큰 도서관에서 명저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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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민심서 |
‘목민심서’는 책만 읽던 백면서생이 수령으로 낯선 지방에 부임했을 때 노회한 아전에 휘둘리지 않도록 꼼꼼히 설명한다. 수령 처신, 공문서 관리, 육방 다스리는 법, 고과 관리, 손님 접대, 구휼 같은 실무를 처리하는 요령을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줬다. 2부 율기(律己)에선 관리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일렀다. 몸가짐은 바르게, 마음은 청렴히, 집안은 잘 다스리고, 청탁을 물리치며, 씀씀이는 절약하고, 베풀기를 즐겨야 한다고 충고했다. 굳이 조선 관리에만 해당하랴. 시대·직위를 막론하고 공인·직장인·남녀노소에 유용한 가르침. 다산은 옛 법은 수령 임명을 중히 여겨 엄격한 절차를 두었지만, 오늘날엔 유명무실해져 용렬하고 무식한 자도 지방 관리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무능한 수령이 지역민을 골병들게 하는 주범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터라 걱정도 깊었다.
개혁 군주 정조를 받들었던 다산은 외직을 나가 결기를 잃지 않았다. 그가 곡산부사로 부임했을 때 이계심이 전임자 학정에 항의해 민란을 일으켰다. 다산은 그를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백성을 위해 의로운 일을 했다며 “너 같은 사람은 관청이 천금을 들여서라도 사들여야 한다”고 칭찬한 후 석방했다.
다산은 효행을 권장할 때도 실학자답다.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했다는 얘기를 좋게 보지 않았다. 알고 보면 성현도 권장하지 않았고, 부모가 물려주신 신체를 훼손하는 과격한 행동이라고 나무랐다. 잉어가 스스로 얼음장 밖으로 뛰어오르고, 잣나무가 까닭 없이 마르는 기적 같은 일을 들먹여 효심을 알리는 관행을 꼬집었다.
이 고전엔 조선 후기 병폐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방에서 온갖 비리와 악행을 저지르는 수령·아전들과 이들이 줄을 댄 부패한 중앙 권력이 활개 쳤다. 다산은 국가개혁론을 담은 ‘경세유표’를 펴내면서 “털끝 하나 병들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탄했다. 이런 조선을 혁파한다는 포부를 가졌던 정조와 신하 다산. 하지만 1800년 6월 정조가 급서하자 다산은 유배된다. 정적들은 다산이 다시 조정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았다. 수원 화성 축조, 한강 배다리[주교 舟橋] 설계 같은 업적을 폄훼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산이 한강 배다리 구축에 관여한 일이 드러나지 않는다.
‘정조와 다산이 조선 개혁에 성공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떻게 바뀌었을까’하는 우문을 던져본다. 두 선현 꿈은 미완으로 남았다. 우리 후손은 얼마나 노력하는가. 부산·서울 시장을 뽑는 보궐선거를 앞두고 참 목민관 얼굴을 그려본다.
서평가·세상관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