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인 치마에 교훈 써낸 ‘하피첩’
- 폐지수레서 발견돼 세상 밖으로
- 결혼 60돌 회혼시 짓고 눈감아
남인 다산은 조선 당쟁에 데었다. 12년간 관리였고 36년 동안은 유배지와 고향(현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저술하다가 벼슬 없이 74세로 숨졌다. 28세 때인 1789년 대과에 급제해 시작된 관리 생활은 짧고 격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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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이 결혼을 앞둔 외동딸에게 보낸 시화 ‘매화쌍조도’. |
10살 연상인 개혁 군주 정조는 스승이자 동지였다. 장기현(현 경북 포항시 장기면), 전남 강진군 등지에서 18년간 귀양살이 했다. 유배 중 시문학 실학 경학 철학 법학 유학 의학 과학 부문에서 책을 쏟아냈다.
1783년 진사시에 붙어 성균관 유생이 됐고, 대과에 5번째 응시한 1789년(정조 13년) 1월 합격했다. 정적이 다산을 공격할까 봐 정조가 부러 급제를 늦췄다는 야담이 전한다. 천주교인이라며 탄핵당해 해미(현재 충남 서산)로 귀양 갔는데 정조가 10일 만에 복귀시켰다. 우의정까지 오른 노론 벽파 거두인 서영보는 다산을 끝까지 괴롭혔다. 1794년 경기 암행어사였던 다산이 관찰사인 서영보가 저지른 비리를 적발해 한때 파직시켰기 때문.
다산은 천주교를 믿었다가 버렸다. 셋째 형 약종과 자형 이승훈은 천주교인으로 순교했다. 순조가 등극한 1801년 세 형제가 신유박해에 휘말렸다. 약종은 참수되었고 둘째 약전과 막내 다산은 각각 전남 완도군 신지도와 장기현으로 귀양 갔다. 맏형 약현(비신도)의 사위인 천주교인 황사영이 비단에 신유박해 고발, 서양 군대 파견 따위를 요구한 글을 써 베이징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돼 처형됐다. 약전 약용은 각각 전남 우이도와 강진으로 귀양 갔다.
2남 1녀를 둔 다산은 강진에서 자녀 앞으로 글과 그림을 띄웠다. 1810년 부인 풍산 홍씨가 34년 전 시집올 때 입었던 홍치마를 보내오자 조각을 내 두 아들(학연 학유)에게 보내는 교훈을 써 묶은 게 하피첩. 이것은 문중에서 사라졌다가 폐지 수레에서 발견된 후 ‘TV쇼 진품명품’ 출품, ‘부산저축은행 사건 압류품’을 거쳐 국립민속박물관에 들었다. 혼사를 앞둔 외동 막내딸은 매화쌍조도를 받았다.
정약용은 차가 났던 강진에선 호를 다산(茶山), 한강 지류가 흐르는 고향에선 열수(洌水, 맑은 물)로 삼았다. 결혼 60돌인 1836년 2월 22일 회혼시(回婚詩)를 짓고 눈을 감았다.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새 날아갔으니/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 같구려/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이 늙지만/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이 밤 목란사 노랫소리 유난히도 좋으니/옛날 하피첩은 먹 흔적이 아직도 남았소/나뉘었다 다시 합침은 우리 모습/한 쌍 표주박 남겨 자손에게 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