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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21세기 한국학 <19> ‘수로부인’과 지방의 민중

수로부인 설화에 담긴 중앙·지방의 대등함, 그리고 민중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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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1-01-03 19:38:28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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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로부인이 원한 절벽 위 철쭉
- 부인 바다 속으로 붙잡아간 용
- 두 이야기 다 민중이 문제 해결
- 신분으로 힘 나눈 인식에 반기

- 강성한 귀족 세력 등 악재에도
- 성덕왕이 36년 간 이룬 위업은
- 민중이 준 권력 덕분임을 표현

앞서의 글(제18회)에서 ‘성덕왕’을 ‘삼국유사-탑상’편의 글 및 ‘삼국사기’ 기록과 견주어 살펴보며 성덕왕의 위업이 대단했음을 말했고, 말미에서는 ‘성덕왕’이 이어지는 ‘수로부인(水路夫人)’의 해석을 위한 포석이라고도 했다. 그 자체로 완결돼 보이는 ‘수로부인’이지만, ‘성덕왕’과 연결 지을 때 그 의의가 분명해진다.

‘수로부인’에 대한 연구는 꽤 많다. 이야기가 흥미로우면서 ‘헌화가(獻花歌)’와 ‘해가사(海歌詞)’ 두 편 노래도 실려 있어서다. 그럼에도 ‘수로부인’에 숨은 진실이 다 드러난 것은 아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노래보다 이야기의 맥락에, 특히 인물들의 행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 경우에 수로부인은 주요 인물이지만 주도적인 역할이 아닌 매개자 역할을 할 뿐임이 드러난다.
민중이 용을 위협하는 해가(海歌)를 불렀음직한 언덕에서 내려다 본, 삼척 증산해변의 해가사의 터.
■젊은 시종들과 시골 노옹

‘수로부인’은 두 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이야기를 먼저 보자.

“성덕왕(聖德王, 702∼737 재위)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로 부임위해 가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바위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바다를 향해 있었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었다. 그 위에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보고는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저 꽃을 꺾어 바칠 사람, 누구인가요?’라고 말했다. 시종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모두들 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때 그들 곁으로 한 노옹이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 왔으며 노랫말도 지어서 바쳤다. 그 노옹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위 이야기 핵심은 철쭉을 꺾어 바친 일이다. 사건이라 할 수도 없을 일이지만, 그 철쭉이 천 길이나 깎아지른 벼랑 위에 피어 있었기에 사건이 될 수 있었다. 철쭉에 마음을 뺏긴 수로부인은 당연히 시종 가운데 누군가 꽃을 꺾어 바치리라 생각하고 물었는데, 그 바람과 달리 시종들은 모두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다. 이들 시종은 분명 젊고 건장했을 테지만, 도성 생활에 익숙한 그들에게 천 길 벼랑은 전장에서 만난 적병보다 훨씬 상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야기에서 “하소연했다”고 했으니, 벼랑을 마치 난공불락 성채처럼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존귀하고 아름다운 부인은 실망하고, 그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던 시종들은 풀죽어 있었다. 그때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옹이 별 어려움 없이 그 꽃을 꺾어 바쳤다. 게다가 노랫말도 지어 바쳤다.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늙은이였다는 뜻이다.

이야기 졸가리는 수로부인과 철쭉을 사이에 두고 서울의 젊은 시종들과 지방의 노옹이 우열을 겨루었다가 멋지게 차려입고 패기만만한 서울 젊은이들이 서울 구경은 해본 적도 없을 법한 노옹의 연륜과 지혜에 여지없이 패배했다는 것이다. 지방 노옹이 서울 젊은이보다 낫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기에는 평범함(노옹) 속에 비범함이 있고 비범함(젊은 시종들) 속에 평범함이 있다는 이치와, 서울과 지방은 대등하다는 원리가 담겨 있다.

■중앙 권력과 지방 세력

동해안의 민중이 오래도록 행했던 동해안별신굿.
‘수로부인’ 두 번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다시 이틀을 더 가니, 또 바다를 굽어보는 정자가 있었다. 거기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바다의 용이 갑자기 부인을 붙잡아서 바다로 들어갔다. 순정공은 자빠지듯이 털썩 주저앉았고, 아무런 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또 한 노인이 일러주었다. ‘옛사람들의 말에 뭇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고 했으니, 이제 바닷속의 짐승이 어찌 뭇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소? 이 지역의 민중을 모아서 노래를 지어 부르며 지팡이로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순정공이 그 말대로 했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 일에 대해 물으니, 부인이 답했다. ‘칠보로 장식한 궁전에서 음식을 바치는데, 달고 기름지고 향기롭고 상큼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익힌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또 부인 옷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풍겼는데, 세상에서 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로부인의 자태는 견줄 이가 없을 정도로 빼어났으므로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나갈 때마다 곧잘 신령한 것에 붙들려 가고는 했다.”

수로부인이 바다의 용에게 잡혀갔다고 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라 상징적 표현인데,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이다. 말미에서 수로부인이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나갈 때 신령한 것에 붙들려 가고는 했다고 한 데에 착안해 수로부인이 무속적 의례를 행하는 과정에서 접신한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사건을 중심에 놓고 해석하면 달라진다.

강릉 지역의 관노(官奴)들이 주체가 되어 벌인 토착의 놀이 강릉관노가면극.
위 이야기 핵심은 바다의 용이 수로부인을 붙잡아 가면서 용과 순정공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부각됐으며, 노인과 민중이 둘 사이 대립과 갈등을 해소했다는 것이다. 앞의 이야기처럼 여기서도 수로부인은 일종의 매개자 구실을 했다. 사건의 드러난 당사자인 순정공은 중앙 권력을, 바다의 용은 해양을 배경으로 한 지방 세력을 대표한다. 부인을 빼앗기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순정공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반면에 남편 앞에서 그 부인을 붙잡아 갔을 뿐 아니라 칠보로 장식한 궁전에서 부인을 대접한 용은 중앙 권력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지방의 세력가다. 앞의 이야기에 이어 지방의 우세함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노인의 등장과 함께 형세가 일변한다.

무력한 상태의 순정공 앞에 나타난 노인 또한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친 노옹처럼 그 지역의 평범한 인물이다. 다만, 이번에는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해결 실마리만 제시했다. 문제가 달랐기 때문이다. 민중이 모여 노래 부르고 지팡이로 언덕을 두드리자 비로소 대립과 갈등은 해소되고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 이야기 또한 지역 사정에 밝은 노인의 지혜를 내세웠는데, 이는 신분이나 지위의 존귀함으로 현우(賢愚)를 가르는 인식에 대한 반론이다. 또 중앙 권력이 무력하고 지방 세력이 강성함을 대비해 겉으로는 지방이 중앙보다 우세할 수 있음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그 권력과 세력 모두 민중의 지지와 호의에 바탕을 둔 것임을 일깨워준다. 즉, 중앙과 지방은 대등한데, 민중에 의해 우열의 판가름이 난다는 것이다.

■성덕을 떠받친 민중

성덕왕이 즉위할 때 중앙은 왕권보다 귀족 세력이 더 강했다. 하물며 지방에 통치권이 미쳤을 리가 없다. 용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지방 세력의 존재가 그런 실정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성덕왕은 갖가지 조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며 36년 동안 안정된 통치를 했다. ‘성덕왕’과 봉덕사종의 종명에 그 위업이 잘 표현돼 있다.

그런데 ‘수로부인’은 왕권을 회복하고 지방 세력의 횡포를 막아주어 성덕왕이 36년 동안 안정되게 통치할 수 있게 해준 실질적 힘은 노인이 대표하는 민중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모든 권력은 민중에게서 나온다는 이치를 담은 것이다. 이에 더해 젊은이와 늙은이, 중앙과 지방, 관리와 민중 따위로 가르고서 현우와 우열, 상하의 차등이 결정돼 있다고 여기는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고자 대등의 원리 또한 제시하고 있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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