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96> 정봉채 사진작가의 ‘지독한 끌림’

우포와 20년 동행… 풍경이 아닌 속살을 찍다

  • 박현주 책 칼럼니스트
  •  |   입력 : 2020-12-20 19:34:07
  •  |   본지 18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 안개·구름·나무와 풀·흐린 날
- 내밀한 모습 담은 사진에세이
- 전시 중인 사진, 책보다 감동

차가운 겨울바람 피하려고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 숙여 길을 걷다가 보도블럭 사이의 작은 풀포기를 보았다. 이 추위에, 무거운 보도블록 사이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풀포기에 뭉클해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살고 있었던 것일까. 매일 다니던 길인데 손가락 두 마디까지 자라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자연의 모습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겁도 없이 베어내고 무너뜨리고 쓸어버린 자리에 인간만을 위한 시설을 세우거나, 그것이 아니면 구경거리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남 창녕 우포늪에 있는 ‘정봉채 갤러리’에서 만난 정봉채 작가. 사진에세이집 ‘지독한 끌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마음으로 정봉채 작가의 우포 사진 에세이 ‘지독한 끌림’을 보았다. 자연이 품고 있는 내밀한 속살을 찍은 사진을 오래, 천천히 보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창녕 우포를 찍은 사진이 넘쳐난다. 아름답게 찍힌 원경이거나, 우포를 배경으로 찍은 사람들의 사진들이다. 그런데 정봉채의 우포 사진은 달랐다. 책의 표지는 얼핏 보면 그냥 회색빛이다. 좀 더 자세히 보자. 수묵화 같다. 안개가 자욱하다. 늪에는 가까이 멀리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몇 개 박혀있고, 더 멀리에 작은 배 한 척이 떠있다. 우포의 새벽인지, 해질녘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이 사진이 우포인지 다른 곳인지도 짐작할 수가 없다. 부끄럽지만, 마치 관광하듯 우포를 다녀온 필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면이다. 우포는 어떤 표정을 가지고 있는 지 얼른 책을 펼쳤다. 오래 한 자리에서 우포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20년째 우포를 찍고 있는 정봉채 작가를 경남 창녕에서 만났다.

■고교시절 처음 보았던 우포

   
지독한 끌림- 정봉채 지음 / 다빈치
우포 옆에 ‘정봉채 갤러리’가 있다. 올해 10월에 갤러리가 완공됐다. 코로나 때문에 공식적으로 개관식을 하지 못했다. 갤러리 안에 들어서니 책에서 보았던 사진들이 눈앞으로, 아니 마음으로 쑥 들어온다. 책으로 보는 것과 갤러리에서 큰 사진으로 보는 것은 감동의 폭이 달랐다. 나뭇가지 주변으로 큰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파문을 보고 있으니, 그 파문이 사진을 뚫고 나와 하염없이 퍼진다. 그 안에 서 있는 기분이다. 저 파문은 바람이 만든 것일까, 새의 날갯짓이었을까. 우포에 간다고 이런 장면이 기다렸다는 듯 연출되어 주지는 않을 터. 비슷한 장면을 보려면 늪가에서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싶어 갤러리에 머물면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정봉채는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한 뒤 순수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사진을 그냥 좋아했어요. 뚜렷한 계기는 생각이 안 나네요. 사진이 천천히 나를 끌어당겼고, 자연스럽게 사진에 빠졌습니다. 우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우포를 언제 만났는지, 왜 끌렸는지 궁금했다.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의 별명은 ‘늪이 된 사진가’이다. 학창 시절과 고등학교 교사 생활 내내 살았던 부산을 떠나 우포늪에 정착한 지 어느새 20년이다.” 그의 고등학교 시절, 창녕이 고향인 친구가 있었다. “고2 여름방학 때, 창녕의 친구 집에 놀러갔어요. 그때 우포를 처음 가봤죠. 세상에 이런 곳이 있구나 싶더군요. 그때부터 우포가 마음에 들어왔어요.”

정봉채는 2000년부터 우포만을 찍어왔다. “오롯이 한 마음으로 우포를 찍기 위해 연금이 보장되기 전에 직장을 그만뒀어요.” 믿을 데가 있으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자신을 극한 상황에 놓아둔 무모함이었다. 그동안 가족들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차에서 먹고 자면서 우포를 찍었다. 새벽에 일어나 우포를 걷고, 한자리에서 바라보고, 기다리고,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을 보았다. 그러는 동안 우포에서 일어나는 모든 표정을 보았다. 우포의 동식물과 물결까지, 우포와 하나가 되고자 했다.

■우포의 가족이 되다

“10년 쯤 지났을 때 너무 힘들어서 우포를 떠나려 한 적이 있습니다. 우포가 나를 온전하게 받아주지 않는 것 같았지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카메라를 들고 나간 날, 고라니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그날의 이야기와 사진이 책에 실려 있다. “수풀을 헤치고 나온 고라니는 내가 있는 곳에서 약 오십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늪이 바라다 보이는 둑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떠오르는 봄 햇살 아래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햇살을 후광처럼 지고 간격을 좁히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러댔지만, 고라니는 도망가지 않았다. 마음껏 찍어보라고, 그동안 고생이 참 많았다고, 이제 당신도 우포의 가족이라고, 그러니 이곳에서 떠나지 말라고, 고라니가 그렇게 말하듯 다가왔던 것이다. 정봉채는 다시 우포에 머물기로 했다. 다시 10년이 흘렀다. 20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우포도 카메라를 든 정봉채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우포와 한 인간은 천천히 낯을 익혔고, 서로를 받아들였다.

천천히 익숙해진 것은 우포와 정봉채만이 아니었다. 필자 역시 그런 기분을 느꼈다. ‘지독한 끌림’은 우포의 사진과 함께, 정봉채 작가의 글이 함께 실려 있는 사진에세이집이다. 사진보다 글이 더 익숙하고 편한 필자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글이었지만, 책갈피를 넘기는 동안 어느새 사진만 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개, 구름, 바람, 나무와 풀, 물결, 작은 배, 맑은 날, 흐린 날, 꽃과 새…. 우포가 품고 있는 속살은 내밀하고 섬세했다. 정봉채의 우포 사진은 경치를 찍은 사진이 아니라, 우포를 찍은 사진이다.

   
정봉채는 사진을 찍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을 만들어내는 것은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숨겨둔 촬영 포인트, 기막힌 셔터 찬스, 최고의 장비가 아니었다. 겸손하고 한없이 작은 사진가가 되는 것, 그럴수록 자연은 숨은 속살을 보여준다는 깨달음이었다. 우포늪을 바라보던 나의 마음처럼 내 사진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정화되는 것, 그것이 내가 오래도록 한결같이 추구해 온 내 사진의 의미임을 알게 되었다.”

책 칼럼니스트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금양 부활할까…AI 데이터센터 진출 임시주총서 가결
  2. 2[도청도설] 발가벗겨진 사우디
  3. 3연 300만 찾는 청사포, 대중교통 하루 8대 마을버스뿐
  4. 415년 발암 석면지붕 슬레이트 치웠는데 증가? 실태조사부터 부실
  5. 5[시민기자] ‘핑크 가을’ 내려앉은 대저생태공원
  6. 6잘 넣긴 하는데…욱하는 외인, 속 타는 구단
  7. 7공항공사, 김해서 5년간 2575억 벌고도 투자 451억뿐
  8. 8양산 사송신도시 거점 준공…수영장·도서관·건강센터 한곳에
  9. 9태종대 집와이어 안전 괜찮나…시험탑승 정상도착 40% 그쳐
  10. 10“미래대응기금 조성, 교부세 축소 안 돼”
  1. 1언론노조·국제 비대위 “대주주 엄벌” 청와대 간다
  2. 2與, 추미애 ‘재정 빨대’ 진화 안간힘인데 기름 부은 부승찬(종합)
  3. 3또 도마 오른 항만공사 통합…“소신없는 사장 책임” 질타
  4. 4[속보] 진영승 합참의장 “北 적반하장 용납 못해…추가 도발 감행시 단호하게 대응”
  5. 5"법령 검토해 결정하겠다"던 김지용 중수청장, 국무회의 참석
  6. 6[2026 국감 브리핑]조경태 “최고 시스템 갖춘 건기연이 가덕도신공항 부지 침하 연구해야”
  7. 7여도 야도 시중은행 연쇄 해킹 사태 집중 질타
  8. 8이 대통령, "생애 첫 연금 지원사업 신청한 사람만? 실질적 불평등"
  9. 9이 대통령 "관행·절차 얽매이지 말고 주택 공급 전격전 펼치길"
  10. 10통일부. 北 대남확성기 재개 위협에 “문제 해결 노력에 호응” 촉구
  1. 1금양 부활할까…AI 데이터센터 진출 임시주총서 가결
  2. 2데이터센터로 돌파구…이차전지 공장 유치권 등은 과제
  3. 3[뭐라노] 금양 부활할까
  4. 4부산 명물 삼진어묵, 상하이 입맛 잡는다
  5. 5내년 주목할 세계 여행지 톱10에 부산… 국내 유일
  6. 6부산 몸집 키우는 해양금융 생태계
  7. 7"원전 사업자 한수원, '안전 미준수' 과징금만 5년간 338억원"
  8. 8선원노련 김두영 위원장, ITF(국제운수노련) 집행위 선출
  9. 9이번엔 할리스…고객 개인정보 276만 건 유출(종합)
  10. 10기술유출 엄단…산업부 ‘특사경’ 도입 추진
  1. 1연 300만 찾는 청사포, 대중교통 하루 8대 마을버스뿐
  2. 215년 발암 석면지붕 슬레이트 치웠는데 증가? 실태조사부터 부실
  3. 3공항공사, 김해서 5년간 2575억 벌고도 투자 451억뿐
  4. 4양산 사송신도시 거점 준공…수영장·도서관·건강센터 한곳에
  5. 5태종대 집와이어 안전 괜찮나…시험탑승 정상도착 40% 그쳐
  6. 6“미래대응기금 조성, 교부세 축소 안 돼”
  7. 7이번에는 진짜 가야할 때…‘부캉이’ 다시 바다로 보낸다
  8. 8어린이집 앞 석면지붕 빼곡…소유주들 빈집 등 이유로 방치
  9. 9상습 음주운전 꼼짝마…후 불어야 시동 걸린다
  10. 10주 15시간 넘기면 인건비 30%↑…생존 위해 쪼개기 고용
  1. 1잘 넣긴 하는데…욱하는 외인, 속 타는 구단
  2. 2전설 수지 수산티 넘은 전설…안세영 47번째 우승 ‘세계新’(종합)
  3. 3KIA 내리 3승이냐, LG 반격 첫 승이냐
  4. 4국대 에이스 곽빈, 최동원상 받는다
  5. 5김태형 유임이냐, 이동욱 전 NC 다이노스 감독·조성환 해설위원 등 새 얼굴이냐
  6. 6돈으로 우승은 못 샀다…MLB 월드시리즈 연봉 하위팀 반란
  7. 7‘통산 최다안타 3위’ 손아섭, 두산에서 방출…선수 생명 이어갈까
  8. 8배드민턴 '세계 최강' 안세영, 여자 단식 최다우승 기록세워
  9. 9부산시청 고은, 전국체전 金…女사격 비공인 세계신기록
  10. 10김도영의 KIA냐, 오스틴의 LG냐
우리은행
얼굴에 담긴 이야기
물극필반(物極必反)
미리보는 제31회 BIFF
스타 만나려면 첫 3일·여유롭게 영화 즐기려면 둘째주 공략
궁리와 시도 [전체보기]
노동 운동부터 계엄까지…예술로 사회문제 비추다
비바람 견뎌낸 그의 회화…마침내 ‘고정관념 감옥’서 해방
김민우의 인서트 [전체보기]
응원하고 함께하는 마음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의 가능한 사랑
문화레시피 [전체보기]
‘부산 발레’ 낙동강 타고 새 물길 열다
붉은 빛 조명, 배우·합창단의 호연…눈앞에 다가온 부산오페라하우스
박현주의 신간돋보기 [전체보기]
일상 언어에서 찾은 삶의 방향 外
쉽게 따라 배우는 걷기명상 外
박현주의 책 이야기 [전체보기]
노력과 성공은 비례하는가…현대사회 씁쓸한 이면
히말라야 빙하 붕괴로 대참사…더 심각해진 기후 재난
아침의 갤러리 [전체보기]
강동윤-Pixelated Oasis
윤상건-Creature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경비원 /박필상
자화상 /최은지
주말 영화 박스오피스 [전체보기]
누적 180만 넘긴 ‘극장판 치이카와’ 2주 연속 정상…예매율도 1위
팬덤의 힘 ‘극장판 치이카와’ 1위로…암살자(들) 근소한 차 2위
오늘의 운세- [전체보기]
오늘의 운세- 2026년 10월 20일 (음 9월 10일)
오늘의 운세- 2026년 10월 19일 (음 9월 9일)
오늘의 BIFF [전체보기]
오늘의 BIFF- 2026년 10월 14일
오늘의 BIFF- 2026년 10월 13일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전체보기]
유배객 자암 김구의 눈에 비친 남해의 가을 바다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비 오는 가을밤에 읊은 시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