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개·구름·나무와 풀·흐린 날
- 내밀한 모습 담은 사진에세이
- 전시 중인 사진, 책보다 감동
차가운 겨울바람 피하려고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 숙여 길을 걷다가 보도블럭 사이의 작은 풀포기를 보았다. 이 추위에, 무거운 보도블록 사이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풀포기에 뭉클해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살고 있었던 것일까. 매일 다니던 길인데 손가락 두 마디까지 자라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자연의 모습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겁도 없이 베어내고 무너뜨리고 쓸어버린 자리에 인간만을 위한 시설을 세우거나, 그것이 아니면 구경거리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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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창녕 우포늪에 있는 ‘정봉채 갤러리’에서 만난 정봉채 작가. 사진에세이집 ‘지독한 끌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
그런 마음으로 정봉채 작가의 우포 사진 에세이 ‘지독한 끌림’을 보았다. 자연이 품고 있는 내밀한 속살을 찍은 사진을 오래, 천천히 보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창녕 우포를 찍은 사진이 넘쳐난다. 아름답게 찍힌 원경이거나, 우포를 배경으로 찍은 사람들의 사진들이다. 그런데 정봉채의 우포 사진은 달랐다. 책의 표지는 얼핏 보면 그냥 회색빛이다. 좀 더 자세히 보자. 수묵화 같다. 안개가 자욱하다. 늪에는 가까이 멀리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몇 개 박혀있고, 더 멀리에 작은 배 한 척이 떠있다. 우포의 새벽인지, 해질녘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이 사진이 우포인지 다른 곳인지도 짐작할 수가 없다. 부끄럽지만, 마치 관광하듯 우포를 다녀온 필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면이다. 우포는 어떤 표정을 가지고 있는 지 얼른 책을 펼쳤다. 오래 한 자리에서 우포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20년째 우포를 찍고 있는 정봉채 작가를 경남 창녕에서 만났다.
■고교시절 처음 보았던 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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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독한 끌림- 정봉채 지음 / 다빈치 |
우포 옆에 ‘정봉채 갤러리’가 있다. 올해 10월에 갤러리가 완공됐다. 코로나 때문에 공식적으로 개관식을 하지 못했다. 갤러리 안에 들어서니 책에서 보았던 사진들이 눈앞으로, 아니 마음으로 쑥 들어온다. 책으로 보는 것과 갤러리에서 큰 사진으로 보는 것은 감동의 폭이 달랐다. 나뭇가지 주변으로 큰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파문을 보고 있으니, 그 파문이 사진을 뚫고 나와 하염없이 퍼진다. 그 안에 서 있는 기분이다. 저 파문은 바람이 만든 것일까, 새의 날갯짓이었을까. 우포에 간다고 이런 장면이 기다렸다는 듯 연출되어 주지는 않을 터. 비슷한 장면을 보려면 늪가에서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싶어 갤러리에 머물면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정봉채는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한 뒤 순수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사진을 그냥 좋아했어요. 뚜렷한 계기는 생각이 안 나네요. 사진이 천천히 나를 끌어당겼고, 자연스럽게 사진에 빠졌습니다. 우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우포를 언제 만났는지, 왜 끌렸는지 궁금했다.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의 별명은 ‘늪이 된 사진가’이다. 학창 시절과 고등학교 교사 생활 내내 살았던 부산을 떠나 우포늪에 정착한 지 어느새 20년이다.” 그의 고등학교 시절, 창녕이 고향인 친구가 있었다. “고2 여름방학 때, 창녕의 친구 집에 놀러갔어요. 그때 우포를 처음 가봤죠. 세상에 이런 곳이 있구나 싶더군요. 그때부터 우포가 마음에 들어왔어요.”
정봉채는 2000년부터 우포만을 찍어왔다. “오롯이 한 마음으로 우포를 찍기 위해 연금이 보장되기 전에 직장을 그만뒀어요.” 믿을 데가 있으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자신을 극한 상황에 놓아둔 무모함이었다. 그동안 가족들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차에서 먹고 자면서 우포를 찍었다. 새벽에 일어나 우포를 걷고, 한자리에서 바라보고, 기다리고,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을 보았다. 그러는 동안 우포에서 일어나는 모든 표정을 보았다. 우포의 동식물과 물결까지, 우포와 하나가 되고자 했다.
■우포의 가족이 되다
“10년 쯤 지났을 때 너무 힘들어서 우포를 떠나려 한 적이 있습니다. 우포가 나를 온전하게 받아주지 않는 것 같았지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카메라를 들고 나간 날, 고라니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그날의 이야기와 사진이 책에 실려 있다. “수풀을 헤치고 나온 고라니는 내가 있는 곳에서 약 오십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늪이 바라다 보이는 둑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떠오르는 봄 햇살 아래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햇살을 후광처럼 지고 간격을 좁히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러댔지만, 고라니는 도망가지 않았다. 마음껏 찍어보라고, 그동안 고생이 참 많았다고, 이제 당신도 우포의 가족이라고, 그러니 이곳에서 떠나지 말라고, 고라니가 그렇게 말하듯 다가왔던 것이다. 정봉채는 다시 우포에 머물기로 했다. 다시 10년이 흘렀다. 20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우포도 카메라를 든 정봉채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우포와 한 인간은 천천히 낯을 익혔고, 서로를 받아들였다.
천천히 익숙해진 것은 우포와 정봉채만이 아니었다. 필자 역시 그런 기분을 느꼈다. ‘지독한 끌림’은 우포의 사진과 함께, 정봉채 작가의 글이 함께 실려 있는 사진에세이집이다. 사진보다 글이 더 익숙하고 편한 필자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글이었지만, 책갈피를 넘기는 동안 어느새 사진만 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개, 구름, 바람, 나무와 풀, 물결, 작은 배, 맑은 날, 흐린 날, 꽃과 새…. 우포가 품고 있는 속살은 내밀하고 섬세했다. 정봉채의 우포 사진은 경치를 찍은 사진이 아니라, 우포를 찍은 사진이다.
정봉채는 사진을 찍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을 만들어내는 것은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숨겨둔 촬영 포인트, 기막힌 셔터 찬스, 최고의 장비가 아니었다. 겸손하고 한없이 작은 사진가가 되는 것, 그럴수록 자연은 숨은 속살을 보여준다는 깨달음이었다. 우포늪을 바라보던 나의 마음처럼 내 사진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정화되는 것, 그것이 내가 오래도록 한결같이 추구해 온 내 사진의 의미임을 알게 되었다.”
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