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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7> 구운몽 - 서포 김만중 (1637~1692)

하늘이 내린 효자 김만중…홀로 남은 노모 위해 ‘구운몽’ 쓰다

  • 서부국 세상관찰자
  •  |   입력 : 2020-11-19 19:07:50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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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란길 배에서 태어난 서포
- 홀어머니가 지극정성으로 교육
- 장원급제해 입신양명 누리다
- 당쟁 휘말려 평안북도로 귀양

- 본인 걱정 말라는 어머니 말에
- 사모하는 마음 담아 구운몽 집필
- 승려와 8선녀의 ‘환몽 소설’
- 남녀평등·인권·계급풍자 담아
- 조선 후기 고전 최고봉 꼽혀

- 숙종, ‘문효’라는 시호 내려
- 글로써 효 다한 서포 추모해

330여 년 전 귀양 간 50대 사대부가 서울에 남은 칠순 홀어머니께 글을 지어 올렸다. ‘구운몽(九雲夢)’은 효심 깊은 아들이 노모를 위로하려 소설 형식을 빌려 쓴 긴 편지다. 아버지는 병자호란이 터진 1636년 강화 도성을 사수하다 남문에서 순국한 김익겸(金益兼 1614~1636). 이듬해 20대 어머니 해평 윤씨는 피란 가는 배에서 그를 낳았다. 가난 속에서 어머니는 아들을 직접 가르쳐 홍문관 대제학으로 키워냈다. 독자는 그 어머니에게 묻는다.
   
‘구운몽’ 속 주요 장면을 옮겨 그린 ‘구운몽도’. 시중 ‘구운몽도’는 대표 장면을 화가가 선정했기에 8~12첩으로 다양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독자:소설 주인공 양소유처럼 아들이 대과 장원 급제했을 때 비로소 어머님은 소리 내 웃으셨다지요.

▶어머니:작은 재능에 교만 않도록 늘 조심했지요. 큰 그릇은 소리가 나지 않는 법이라고 타일렀답니다.

‘구운몽’은 허구이자 현실. 조선 사대부는 당쟁에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이기면 입궐, 지면 귀양. 소설 속 양소유 삶이 그랬다. 그런 부침 끝엔 무엇이 남았을까.

▶독자:어머님께서 왼손엔 미음 그릇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회초리를 쥔 채 교육했던 아들이 낯선 유배지에서 이 글을 썼군요.

▶어머니:아들은 먼 길을 걸어왔지요. 저희 모자는 최선을 다했으니 여한이 없답니다. 앞날은 이제 하늘에 맡기고 기다리렵니다.

독자는 안다. 아들 효심은 청사에 남았고, 부귀영화는 먼지임을. ‘구운몽’은 사모곡 중 최고봉이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아호는 선생(船生). ‘배에서 태어난 아이’는 장성해 고관이 됐지만, 당쟁에 휘말려 평북 선천에서 귀양(1687년 9월~1688년 11월)을 살았다. 이때 지은 장편소설이 ‘구운몽’이다. 춘향전과 함께 조선 후기 고전 소설에서 쌍봉을 이룬다.

출생부터 죽기까지 그 서포 일생은 소설 같다. 조선 19대 숙종이 재위한 지 13년째인 1687년. 빈 인동 장씨가 숙원 품계를 받은 이듬해였다. 당시 집권 세력인 서인은 장씨가 낳은 왕자 윤(20대 경종)을 원자(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 맏아들)로 삼으려는 숙종에게 반대하다가 줄줄이 유배 갔고, 남인이 득세했다. 서인으로 당시 판의금부사였던 51세 서포도 그랬다. 평북 선천이 귀양지였다. 유난히 집안에 흉사가 잇따른 한 해. 아우 서포처럼 대제학으로 명성을 날려 노모에게 기쁨이었던 네 살 손위 장남 김만기가 세상을 등졌다. 노모는 굳건하다. “유배는 선현도 피하지 못했다. 그곳에 가더라도 나를 염려하지 말고 자신을 잘 돌보라.” 아들은 그날로 붓을 들어 ‘구운몽’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구운몽’은 소동파 같은 시인이 ‘넓은 마음’을 은유한 단어로 썼다. 마음이 편하다는 뜻. 서포는 이 단어를 소설 제목으로 삼아 넌지시 노모를 위로한다. 아홉이란 숫자는 ‘젊은 수행승과 8선녀(정경패 이소화 가춘운 진채봉 적경홍 계섬월 백능파 심요연)’를 나타낸다. 그들이 꾼 한바탕 꿈이 이 소설 소재.

줄거리는 이러하다. 당나라 형산, 젊은 승려 성진은 육관 대사 아래 정진하던 중 8선녀를 만나 노닥거린 후 불심이 흔들린다. 육관 대사는 그 벌로 성진·8선녀를 속세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한다. 성진은 양 처사와 유 씨 부부 아들로, 8선녀는 다양한 신분으로 환생했다. 8선녀는 모두 양소유와 부부(정부인 2명, 첩 6명) 인연을 맺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은퇴한 양소유에게 육관 대사가 찾아와 9명이 하룻밤 같은 꿈을 꾸었다고 일러준다. 9명은 세상 부귀영화가 허무함을 깨닫고 불도를 닦아 극락세계로 들어간다.

‘구운몽’ 주제는 불교 공관(空觀, 세속 만사 만물을 부정하고 이에 집착하지 않는 사상)으로 묵직하지만, 이야기는 밝고 재미난다. 유불선(儒佛仙) 3대 사상을 녹여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줄거리는 진보로 기운다. 고리타분하지 않다. 무엇보다 당대에서 보기 드문 남녀평등 사상이 돋보인다. 어머니 해평 윤씨가 사대부 수준으로 교육받았고, 홀로 형제 대제학을 키워낸 강인한 여성. 그 기운이 스몄다. 요즘 말로 서포는 ‘성 인지 감수성’을 갖춘 문인. 군주와 신하, 주인과 하인, 정실과 후실, 부자와 빈자, 인간과 귀신, 승자와 패자도 차별하지 않는다. 17세기 우리 소설에서 인권 사상을 발견하다니!

절세가인과 누리는 향락, 부마까지 오르는 입신양명, 신(神)과 벌이는 전쟁과 사랑, 복잡미묘한 혼인 과정, 그러다 한순간에 만사를 내려놓고 불교로 귀의하는 반전 결말. 당시나 지금이나 독자를 매료시킨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환몽 소설. 서포는 노모가 ‘구운몽’을 읽으며 미소 짓도록 세심하게 얘기를 짰다. 양소유와 결혼한 부인들이 짜고 남편을 골탕 먹이는 대목이 그렇다. 일부다처제는 옥에 티.

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궁중 혈육 분쟁은 없다. 소설 속 8명 부인 모두 자녀를 1명씩 둔다. 권력자가 자식을 많이 둬 자초하는 씨앗 분쟁을 조심하라는 은유가 아닐까. 8명 아내가 남편과 재산을 공유하다가 의자매를 맺는 장면에선 조선 계급사회에 보내는 야유가 어른거린다.

서포는 양소유이기도 하다. 10대 양소유가 신선이었다는 부친이 홀연히 선계로 떠난 후 홀몸이 된 어머니를 부양하려 과거(科擧)에 나서는 대목이 그렇다. 유복자로 태어나 어렵게 홀어머니 밑에서 공부해 문과 정시에 28세 때 장원급제한 서포다. 양소유가 보인 화려한 여성 편력은 없었지만, 두 사람이 모두 효자라는 점은 닮았다.

양소유는 여러 절세가인을 취하고 고관대작으로 입신양명한다. 이를 두고 당시 조선 사대부 욕망을 대리 실현한다는 후대 평가도 나왔지만, 뒤집어보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성욕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남성상이 불거진다. 양소유는 인간으로 완전히 변신하기 전이라 몸에 비늘이 많이 남았다며 잠자리를 꺼리는 용녀를 품는다. 그는 귀신으로 분장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뒤 후일 부인과 지인에게 두고두고 놀림감이 된다. 모친이 재밌게 읽으시라고 꾸며낸 얘기 속에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 화가 미친다는 철칙을 숨겨놓았다. 공인이 여성을 함부로 대해 패망한 사례는 지금 이 땅에서도 잇따른다. 서포는 이 고전에서 경고장을 보여줬다.

‘구운몽’ 원본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한글과 한문으로 필사한 이본이 각각 190, 220여 권에 이른다. 여러 정황상 원본이 한글로 쓰였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모자가 품은 한글 사랑이 남달랐기 때문. 서포는 한글을 자랑스러워했다. 어머니도 아들에게 송강처럼 한글로 글을 써 보길 권유했고, 스스로 한글 작품을 즐겨 읽었다. 한글로 썼다면 출판 시장을 내다본 탁월한 선택. 한문에 익숙잖은 평민과 규방에서 널리 읽혀 대중성을 확보한 고전이었다. ‘구운몽’ 한글 필사본은 날개 돋친 듯 유통됐다. 당시 서울 청계천 변 세책점(貰冊店, 필사본을 돈 받고 빌려주는 가게) 대여 순위에서 윗자리를 차지했다. 그때 규방 여인들이 패물을 팔아 ‘구운몽’ 한글 필사본을 빌려 봤다는 학계 주장도 나왔다.

   
아들이 정성을 다해 쓴 ‘구운몽’을 읽으면서 미소 짓는 칠순 노모가 떠오른다. 애절한 사모곡을 다 부른 아들은 모친이 세상을 뜬 지 일 년이 지난 1692년(숙종 18년) 유배지 남해 고도에서 숨결을 놓고 어머니를 뵈려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숙종은 그를 추모하며 1706년(연간 32년)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문효, 글로써 효를 이뤘다는 뜻이다.

세상관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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