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든일 겪던 시기 시나리오 만나
- 제목 보자마자 “이건 운명” 느껴
- 이혼소송·복직 앞둔 형사로 열연
- 섬마을 실종소녀 사건 파헤치다
- 자신과 동질감 느끼며 위안 받아
- 목격자 순천댁역 이정은과 호흡
- 마지막 장면서 함께 눈물 쏟아내
-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이”
- “아픔과 절망의 시기 견디는 것
- 그 자체로 의미 있어” 소감 밝혀
‘내가 죽던 날’이라는 영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닌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과거형으로 표현된 제목 때문에 혹시 ‘내가 다시 태어난 날’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것은 아닌가하는 궁금증도 생긴다.
맞다. ‘내가 죽던 날’(개봉 12일)은 영화 내내 아프지만 그 끝에는 깊은 여운과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묘한 영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국 영화의 대표 배우 김혜수가 있다. 그는 “‘내가 죽던 날’은 장르도 내용도 모른 채 그냥 받았는데 제목만 보고 나도 모르게 마음이 훅 갔다”는 김혜수는 “살인사건 이야기인지 절망을 다룬 이야기인지 전혀 몰랐는데, 왠지 ‘맞아 내가 죽던 날이 나도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운명같이 느껴졌다”고 이 영화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김혜수가 왜 제목만 보고 이 영화에 끌렸는지, 그리고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어떤 소중한 경험을 했는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서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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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이혼 위기에 놓이고,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징계를 받고 복직을 앞둔 형사 김현수 역을 맡은 김혜수. 그는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이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강영호 작가 제공 |
■절망 끝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다
아버지와 오빠의 범죄 사건 증인으로 섬마을에서 보호를 받던 소녀 세진(노정의)이 유서 한 장만 남기고 절벽 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혼 소송과 불미스러운 일로 징계를 받고 복직을 앞둔 형사 현수(김혜수)는 이 사건을 마무리하러 섬으로 찾아간다. 그런데 사건을 파헤칠수록 뭔가 미심쩍은 점들이 발견되고, 현수는 인생이 한순간 헝클어져버린 세진과 자신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말을 못 하는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이정은)을 통해 사건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섬마을과 도시를 오가며 탐문 수사 형식으로 진행되는 ‘내가 죽던 날’의 분위기는 시종 무겁고 쓸쓸하다. 외딴섬 절벽 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녀와 그녀의 행적을 쫓는 형사,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무언의 목격자는 서로 비슷한 점이 없는 것 같지만 어느 새 동질감과 함께 연대감까지 느낀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글로 위안을 받았다. 관객들도 현수를 따라가다 보면 감정을 이입하게 될 텐데, 잘하기보다 제대로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혜수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읽고 느낀 위로를 관객에게 건네고 싶었고,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글을 영상으로 재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 같아서 내가 너무 겁 없이 시작했나 싶기도 했다. 글과 영상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나 싶었다. 제대로 메워가면서 영화로 만들고 있나 싶어서 중간중간 박지완 감독님, 메인 스태프와 모여 다시 촬영 회의를 하기도 했다.” 촬영을 시작하니 더 잘하고 싶은 생각이 커지고 그러다 보니 두려움까지 생겼다.
그렇다면 ‘내가 죽던 날’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김혜수의 마음을 두드렸을까? 김혜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아픔을 꺼내놓았다. ‘내가 죽던 날’은 김혜수가 지난해 방송을 통해 어머니의 채무 관계가 알려졌을 때 만난 작품이었고, 영화 속 인물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껴 출연하게 됐다.
■누구에게나 있을 상처들, 하지만 위로를 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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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바닷가 절벽으로 사라진 소녀와 그녀의 행적을 쫓는 형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내가 죽던 날’. 삶의 벼랑 끝에 놓인 두 여성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품으로, 영화를 본 후 잔잔한 여운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
“영화 속 현수와 실제 저는 다르지만 누구나 말할 수 없고 드러낼 수 없는 상처나 고통의 순간이 있다는 점에서 공감이 됐다. ‘세상에 가장 쓸모 없는 것이 연예인 걱정’이라고 하지만 저를 포함한 모두가 고통 절망 좌절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후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김혜수는 8년 전 어머니가 사업을 이유로 지인들에게 13억 5000만 원의 돈을 빌렸다가 갚았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채무 문제가 발생해 거의 자신의 전 재산을 써가며 책임을 졌다. 그러다 급기야 어머니와 연을 끊기까지 했던 아픔이 있었다. “제 가족 문제가 알려진 것은 지난해였지만 제가 처음 그 일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이다. 이전에 저에게 생긴 힘든 일이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어서 대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왜 나는 아무 것도 몰랐을까요. 모르고 있어서 벌 받나봐요”라는 세진의 대사가 내 심정 같았다. 지난해 그럴 때 만난 작품이 ‘내가 죽던 날’이라서 마음이 더 끌렸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김혜수를 아끼는 친구들이 있었다. “더는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연기를 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친구가 ‘3년간 죽었다고 생각하고 날 믿고 같이 해달라’며 위로해 줬다.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지금까지 해온 내 일을 더럽히지 않고 마감하리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로 충격과 상처를 받지만 반대로 예상하지 않은 누군가를 통해서 힘을 얻고 위안을 받았다.”
■또 하나의 소중한 인연, 이정은
‘내가 죽던 날’은 김혜수에게 또 한 명의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해준 작품이다. 촬영장에 가는 것이 설렐 정도로 소중한 인연이다. 바로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 역을 맡은 이정은이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으로 대세 배우로 떠오른 이정은이지만 영화 출연을 결정할 당시에는 지금처럼 알려지기 전이었다. “이정은 씨는 너무 좋은 사람이자 좋은 배우다. 그가 연기를 잘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런데 그 이상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은 그의 인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배우를 만난 것이 너무 큰 축복이다. 이정은 씨랑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같은 것이 있다.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품는 것이 있다.”
영화에서 김혜수와 이정은이 마지막으로 부둣가에서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리허설을 하면서 둘이 함께 눈물을 많이 흘려 지켜보던 스태프들까지 숙연해졌다. “그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현수와 순천댁, 김혜수와 이정은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서로 울면서 가만히 있었다. 실제 촬영에서는 그렇게 감정을 쏟아내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 감정을 촬영장에서 느꼈다는 것이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영화 속 인물과 현실의 인물이 겹치면서 두 배우 모두 순간 힘들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며 왈칵하는 감정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닐까 싶다.
김혜수가 작품에서 만나고 싶은 배우가 있다. “바로 김혜자 선생님이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촬영 현장을 찾았다가 우연히 뵌 적이 있다. 선생님이 차 안에 계셔서 용기를 내서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그때 10분 정도 함께 있으면서 편안하게 해주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크게 다가왔다. 그때 선생님의 눈은 너무 깨끗하고 순수했다. 이후 선생님과 작품에서 만나는 것을 꿈꿨다.”
데뷔 이후 35년간 김혜수가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는 무수히 많다. 그런데 ‘내가 죽던 날’은 그에게 최고의 작품은 아닐지 모르지만 가장 특별한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배우와 관객이 모두 위안을 받고 희망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상처나 절망이 완벽하게 치유되진 않을 것이다. 그 시기를 살아낸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모든 분의 상처와 고통의 깊이를 가늠할 순 없겠지만 다만 저희가 내미는 손에서 다독이는 느낌을 받는다면 좋겠다.”
이원 기자 latehop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