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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21세기 한국학 <4> ‘삼국유사’는 합작품이다

구전 이야기도 문헌 기록과 대등하게 기술…지식 넘어 지혜를 담다

  • 정천구 고전학자
  •  |   입력 : 2020-09-20 20:07:24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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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5에만 일연의 편찬 사실 적시
- 다른 4권에만 있는 피휘법 두고
- 변죽을 울리는 다른 저작자 논쟁

- 비슷한 시기 활동 원감국사 충지
- 시 통해 고통 동정하는데 그쳐

- 일연은 민중 이야기를 책에 실어
- 상·하층의 대등함 보여주려 해
- 그들의 목소리로 삼국유사 완성

일연이 민중 항쟁 지역을 두루 다니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 그가 민중의 주체성과 자율성에 주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자신이 승려로서 득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민중의 본래 성품 곧 불성(佛性)을 꿰뚫어 보아야 했다. 당시 그 지역들을 다니며 수행한 승려가 일연 이외에도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통찰은 결코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다.
   
1 삼국유사 권5의 첫머리에 나와 있는 ‘일연찬’ 표지. 2 삼국유사 <고구려>의 일부. 출처가 밝혀져 있다. 3 삼국유사 <신라시조혁거세왕>의 일부. 출처가 없다.
일연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승려로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冲止, 1226∼1293)가 있다. 그는 몽골의 침략과 원(元)의 일본 원정으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살던 민중을 보고 많은 시를 지었다. “창과 방패 곳곳에서 일어나니, 사해는 온통 연기와 먼지라네. 백성들은 달달 볶여 괴롭거니, 보이는 것마다 애달프구나.” “영남지역 백성의 고된 모습, 말로 하려니 눈물 먼저 흐르네. … 처자식은 땅에 주저앉아 울고, 부모는 하늘 보고 울부짖네.” 충지는 민중의 참상을 시로 표현하며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동정했으나, 거기서 그쳤다. 그 자신이 지배층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친원(親元) 행보를 보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민중의 본성을 꿰뚫어 보지 못한 탓이 크다.

반면, 일연은 ‘삼국유사’를 통해 민중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앞서(제3회 ‘일연의 삶에 스며든 민중 항쟁’) “‘삼국유사’는 민중에 대한 보고서”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나아갔다.

■일연의 단독 찬술이 아니다?

   
민중의 참상을 시로 표현한 충지를 기린 ‘원감국사비’.
‘보각국존비’에 ‘삼국유사’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음에도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현재 남아 있는 ‘삼국유사’의 권5 첫머리에 새겨진 ‘국존조계종가지산인각사주지원경충조대선사일연찬(國尊曹溪宗迦智山麟角寺住持圓鏡冲照大禪師一然撰)’이라는 글귀가 “일연이 편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연이 단독으로 찬술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꽤 많다.

“‘삼국유사’는 일연의 단독 작업이라기보다 그의 문도들이 대거 동원되어 만든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채상식, ‘고려후기불교사연구’, 일조각, 1993)거나 “다른 사람의 글들이 문장 곳곳에 발견되는 것은 ‘삼국유사’의 편찬이 일연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을 방증하는 일”(박진태 외, ‘삼국유사의 종합적 연구(1)’, ‘한국민속학’ 29호, 1997)이라거나, “‘삼국유사’ 전체를 일연의 저작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권차(卷次) 또는 제편목(諸編目)에 따라 각기 다른 편찬자를 상정할 수 있다”(하정룡, ‘삼국유사 사료비판’, 민족사, 2005)라는 견해가 그러하다.

이렇게 다른 편찬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예컨대, ‘삼국유사’는 모두 다섯 권인데, ‘일연찬(一然撰)’이라는 표지가 권5에만 있고 나머지 네 권에는 없다는 점, 다른 권에서는 지켜지는 피휘법(避諱法, 글을 쓸 때 국왕의 이름을 피해 비슷한 뜻을 가진 다른 글자를 쓰는 일)이 권5에서만은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그렇다면 다른 편찬자는 누구인가? 아직 확정된 바 없다. 게다가 이런 논의가 ‘삼국유사’ 해석과 이해에 과연 긴요하고 유용한지도 의문이다. 일연 이외의 편찬자를 상정하는 것은 오히려 ‘삼국유사’를 관통하는 핵심원리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즉, 다른 편찬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은 그 불완전하고 엉성해 보이는 체재와 구성, 통일성이 없어 보이는 서술방식 따위 외형적인 면에 가려져 있는, 또는 숨어 있는 ‘일연의 인식 방법이나 세계관’을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변죽을 치는 논의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문헌과 대등한 민중의 구전

‘삼국유사’가 일관성이나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거론하는 사항이 있다. 각 조목에서 문헌 출처를 밝히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뒤섞여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일연은 ‘고조선(古朝鮮)’에서는 ‘위서(魏書)’와 ‘고기(古記)’ ‘구당서(舊唐書)’ ‘통전(通典)’ 등의 문헌에서, 또 ‘고구려(高句麗)’에서는 ‘국사(國史)’ 곧 ‘삼국사기’에서 인용했음을 밝히며 서술했는데,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 ‘제사 탈해왕(第四脫解王)’ ‘연오랑 세오녀(延烏郞細烏女)’ 등에서는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출처를 밝힌 글과 출처를 밝히지 않은 글의 차이는 매우 단순하다. 출처를 밝힌 글은 다른 문헌의 기록을 옮긴 것이고, 출처를 밝히지 않은 글은 일연이 민중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옮겨 놓은 것이다. 일연은 문헌 기록과 구비 전승 또는 문서화된 글과 구술되는 말이 구분되도록 해두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고구려’와 ‘신라시조 혁거세왕’을 비교해 보자. ‘고구려’에서는 주몽의 탄생과 고구려 건국 이야기를 서술했는데, 그 출처를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라 했다. 실제로 ‘삼국사기’의 내용과 거의 같다.

그런데 ‘신라시조 혁거세왕’에서는 아무런 출처 없이 혁거세와 알영의 탄생 그리고 죽음 등을 이야기했는데, 그 내용이 ‘삼국사기’의 ‘신라본기(新羅本紀)’와는 아주 다르다. 이는 일연이 주몽 이야기는 직접 들은 적이 없고 혁거세와 알영 이야기는 경주에서 직접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연은 고조선을 비롯해 위만조선, 북부여, 발해와 말갈 등에 대해 서술할 때는 다양한 문헌에서 인용했다. 이는 그가 개경 이북으로는 간 적이 없어서 구전되던 이야기를 들을 기회 또한 없었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신라 지역과 관련된 조목에서는 문헌의 인용이 없이 서술한 이야기가 매우 많은데, 이는 현지에서 직접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를 설화집이라 하는 까닭은 일연이 민중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이 대거 실려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삼국사기’에 풍부한 신라 쪽 기록들을 제쳐두고 민중이 구전하던 이야기를 주로 실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게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일연은 설화를 모으려 한 것이 아니다. 민중이 전하는 이야기들도 문헌 기록 못지않게 역사적 사실과 진실, 이치를 담고 있음을 꿰뚫어 보고 문헌 기록과 나란히 실은 것이다. 이로써 상층 지배층의 문헌 기록과 하층 민중의 구비 전승은 대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일연과 민중의 합작품이다

일연은 당대 최고의 승려이면서 지식인이었다. 그의 박람강기와 박학다식은 견줄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민중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저술에서 민중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했다.

붓으로 그 목소리를 뭉개거나 슬그머니 가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붓을 통해 민중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삼국유사’는 일연과 민중이 서로 문헌 지식과 구전 지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한 바탕 마당극이, 일연이 앞소리를 하고 민중이 뒷소리를 하는 걸쭉한 민요가 되었다.

일연은 민중의 처지를 동정하기보다는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인식했으며, 나아가 공동 창작이라는 인류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아 민중과 함께 ‘삼국유사’를 썼다.

   
요컨대 ‘삼국유사’는 일연과 민중의 합작품이다. 그러니 ‘민중’ 이외 다른 편찬자가 누구인지 논의하는 일은 부질없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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