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무진이 칭기즈 칸 즉위한 해
- 평민 가정서 태어난 사내 ‘견명’
- 어린 나이에 속가와의 연 끊고
- 5년의 절간생활 뒤 정식 승려 돼
- 또 다른 이름인 ‘일연’으로 개명
- 22살에 승과시험 1등으로 합격
- 전국 각지 사찰 돌며 불교 공부
- 이후 최고계급 대선사까지 올라
- 은퇴 후 인각사서 삼국유사 완성
1206년! 대륙의 초원에서는 거대한 힘이 꿈틀대고 있었다. 뿔뿔이 흩어져 살던 몽골인을 하나로 아우른 테무진이 ‘칭기즈 칸’에 즉위했기 때문이다. 장차 그의 군대는 유라시아 대륙을 공포와 전란, 변혁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고, 대륙 끝자락에 있던 고려까지 짓밟을 것이다. 바로 그 해, 동경(東京, 경주)에서 서쪽으로 150리쯤 떨어진 장산(獐山, 지금의 경산시 압량읍)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견명(見明)이고 자는 회연(晦然)이었다. ‘밝음을 보라’는 이름이나 ‘어두컴컴하다’는 뜻의 자나 모두 암울한 시절을 나타내는 듯하다. 1170년, 몽골 침략 이전에 이미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난세로 접어든 고려였다. 회연은 나중에 일연(一然)으로 이름을 바꾼다. 바로 ‘삼국유사’의 저자다. 일연에 대해서는 ‘보각국존비(普覺國尊碑)’의 비문이 자세히 알려준다. 경북 군위군 고로면 인각사(麟角寺)에 지금도 서 있는 이 비석은 부서지고 떨어져 나가고 닳아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정성껏 모아 빼어난 솜씨로 새긴 덕분에 조선 시대부터 전하는 탁본이 여럿 있어서 비문 내용을 알 수 있다. ‘보각국존비’는 일연의 생애뿐 아니라 ‘삼국유사’를 이해하는 데도 긴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아홉 살에 시작된 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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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연 영정’. 백계 정탁영이 1984년 그린 이 그림은 1985년 일연 스님의 표준영정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 |
아버지는 이름이 언필(彦弼)인데,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향리(鄕吏)나 평민으로 여겨진다. 어머니는 이씨(李氏)다. 일연은 1206년 6월 신유일에 태어났다. 세상이 어지러웠던 탓일까? 어려서부터 세속을 벗어날 뜻이 있어 아홉 살에 해양(海陽)의 무량사(無量寺)로 가 몸을 맡겼다고 한다. 해양은 광주광역시의 옛이름이다. 장산에서 어림잡아 600~700리는 족히 넘는 거리에다 겹겹이 산을 넘고 강도 건너야 이를 수 있는 곳이다. 그 길을 아홉 살에 갔단다.
왜 가까운 절을 두고 그리 멀리 갔을까? 아무리 뜻이 굳었다 해도 어린 나이였기에 어버이의 자애와 속가의 인연을 끊기란 참으로 어렵다. 고된 절간 생활을 하다 보면 그리움에 젖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뜻을 다잡기가 쉬울까? 그래서 아예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게끔 속가에서 한량없이 멀리 떨어진 무량사로 갔으리라.
일연은 무량사에서 4, 5년 사미(沙彌) 생활을 한 뒤, 고종 6년(1219)에 강원도 양양군의 진전사(陳田寺)로 향했다. 처음 여정보다 두세 갑절 더 멀고 험난한 길이었으므로 이 자체가 고행길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불도를 구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느껴질 정도다. 이 진전사에서 대웅(大雄) 장로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되었는데, 나이 열넷이었다. 구족계를 받은 뒤에는 강원도 일대 선방을 두루 다니며 참선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참선만 하지는 않았다. 비문은 “참선하는 여가에 거듭 대장경(大藏經)을 꼼꼼하게 읽고 여러 대가의 장소(章疏, 해석서 또는 주석서)들을 속속들이 연구했으며, 유가의 서적도 두루 읽고 제자백가까지 아울러 꿰뚫었다”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다종다양한 자료를 보면, 이 말이 헛된 찬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나 지금이나 선종 승려들은 경전과 논서조차 심드렁하게 여기는데, 일연은 온갖 세속 학문까지 아울렀다.
■멈추지 않은 유행(遊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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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군위 인각사에 있는 보각국사 탑과 비. 문화재청 |
고종 14년(1227), 스물두 살에 일연은 승과(僧科)에서 상상과(上上科) 곧 최상의 점수로 합격했다. 그 뒤 포산(包山)의 보당암(寶幢庵)에 머물며 선관(禪觀)을 닦는 데 힘썼다. 포산은 대구 비슬산(琵瑟山)을 가리킨다. 강원도 양양에서 다시 남쪽으로 멀리 내려온 것이다. 고종 23년(1236) 몽고군이 침략해 왔을 때도 이 산에 머물면서 “생계불감, 불계불증”(生界不減, 佛界不增) 곧 “중생의 세계는 줄지 않고, 부처의 세계는 늘지 않는다”는 구절을 화두로 삼아 정진하다가 문득 환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 해에 삼중대사의 법계(法階)를 받았는데, 당시 선종의 법계는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 순서였다.
일연은 고종 33년(1246)에 선사를, 고종 46년(1259) 대선사를 받았다. 고종 36년(1249) 상국(相國) 정안(鄭晏)의 초청을 받고 남해(南海)에 가서 정림사(定林寺) 주지가 됐다. 정안은 당시 남해에서 팔만대장경 간행을 주도하고 있었고, 정림사는 그 간행의 중심 사찰이었다. 원종 2년(1261)에는 임금의 조서를 받고 당시 수도였던 강화도로 올라가 선월사(禪月寺)에 머물면서 지눌(知訥)의 법통을 이었다. 원종 5년(1264) 가을 남쪽으로 내려와 경북 포항 오어사(吾魚寺)에 머물렀다. 얼마 뒤 비슬산 인홍사(仁弘寺) 주지인 만회(萬恢)가 일연에게 주지 자리를 사양해 인홍사로 옮겼다. 인홍사에 머문 지 11년 만에 이 절을 중건했는데, 절 이름을 인흥사(仁興寺)로 바꾸니 임금이 제액(題額)을 써서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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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성(書聖)으로 꼽히는 중국 서예가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서 쓰고 새긴 보각국사 비문. 문화재청 |
충렬왕 4년(1277), 왕의 명을 받고 운문사(雲門寺)에 머물렀다. 충렬왕은 일연을 매우 공경했다고 한다. 그리운 마음에 시를 지어 보냈을 정도로. 이윽고 충렬왕 8년(1282) 가을 왕이 조서를 보내므로 일연은 대궐로 가 설법했다. 이듬해 일연이 사양했음에도 왕이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원경충조(圓徑沖照)’라는 호를 내렸다. 이 해에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거듭 청해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 이듬해 어머니가 아흔여섯 연세로 돌아가셨다. 조정에서는 인각사를 일연이 머물 곳으로 정한 뒤 칙명으로 절을 수리하게 하고 논밭을 하사했다. 5년 뒤인 1289년 일연은 인각사에서 입적했다.
불교에서 수행은 행각(行脚)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법랍이 어느 정도 되거나 명망을 얻고 널리 존숭받게 되면, 대개 행각을 멈추고 한곳에 머문다. 일연처럼 왕과 권신, 승려들로부터 두루 존숭받는 고승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일연은 무량사에서 진전사로, 곳곳의 선방으로, 비슬산에서 남해로, 강화도로, 오어사와 인흥사, 운문사로, 개경의 광명사를 거쳐 인각사로 옮겨 다녔다. 그의 일생은 한마디로 유행(遊行)이었다. 이 유행에서 본 것과 들은 이야기가 ‘삼국유사’의 뼈대를 이루고 있음은 차츰 이야기하겠다.
■비문에서 빠뜨린 저술
중세는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보편종교의 시대였다. 그리하여 성자나 고승이 영웅이었다. 불교의 영웅은 대체로 스스로 출가해 구도의 길을 걸으며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거나 스스로 수행해 깨달은 뒤 널리 중생을 제도하고 입적하는 일생의 구조를 공통으로 보여준다. 일연 또한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전형적인 고승의 삶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 참된 위대함은 비문에 있지 않고 ‘삼국유사’에 있다. ‘보각국존비’는 일연이 짓거나 편수(編修)한 책이 모두 100여 권이라고 하면서 목록도 제시했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흔히 ‘삼국유사’를 미완성이라 하는데, 그 때문에 빠진 것일까? 아니다. 빠뜨린 것이다. 국존이라 일컬어지는 당대 가장 뛰어난 선승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이고 난삽해 보이는 저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중세의 통념과 일반적인 인식을 훌쩍 넘어선 저술이다.
정천구 고전학자
※공동기획
·㈜상지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국제신문 인문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