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나전칠기 수요 폭발
- 원자재 공급 원활했던 이점 살려
- 자개 관련 공방 150여 곳 성황
- 특소세 부과·저가품 범람 직격탄
- 현재 영업하는 곳 손 꼽을 정도
부산 동구 좌천동 가구거리를 기억하고 찾는 사람은 많지만, 이곳 뒤편 자개골목을 기억하는 이는 찾기 힘들다. 자개골목은 나전칠기에 쓰인 자개 재료를 가공하고 판매하던 곳이 밀집된 거리다. 한때 나전칠기가 호황을 누리면서 이 골목에는 자개를 엷게 만드는 섭패공방, 자개를 실처럼 잘라 상사를 만드는 절삭 공방, 자개의 문양을 만드는 조각 공방이 5~13㎡ 규모로 밀집할 정도로 번성했다. 최전성기인 1970년 후반에는 150곳이 넘게 있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손에 꼽을 정도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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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진칠기 정정학 사장(왼쪽)과 끊음질을 하는 나전 장인 강정원 씨. |
■부산의 전성기 때 들어선 자개골목
최근 이 자개골목을 재조명한 책 ‘좌천동 가구거리와 자개골목’(사진)이 나왔다. 문화재청 이현주 문화재감정위원이 저술했다. 부산시와 국립민속박물관이 ‘2021년 부산민속문화의 해’ 사업의 하나로 내는 부산의 특색있는 문화를 조명한 주제별 조사 보고서 중 1권이다. 책은 자개골목의 화려했던 과거와 지금은 장인 몇몇이 남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현재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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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부산 동구 좌천동 자개골목 풍경. |
자개골목이 부산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부산항을 끼고 있어 원재료 수급이 쉬웠고, 생활 수준이 높아 수요도 많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도 분업화된 재료 세공과 공급이 필요한 가구거리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이 위원은 “부산은 원래 전국에서 생활 수준이 가장 높은 곳으로 유행이 시작된 도시였다. 6·25전쟁후 밀수의 본거지로 각종 생필품이 조달되면서 주름치마 등 유행이 시작됐다. 부산지역은 공업화도 가장 빨리 이뤄져 1970년대 전국 시도 중 가장 소득이 높은 도시로 고가품이자 사치품인 나전칠기 수요도 많았다. 이 때문에 부산에서 유행한 고급 나전칠기는 서울로 퍼져 나갔다”고 했다.
그렇지만 1976년 칠기가구가 사치품이라며 특별소비세를 매기게 되면서 성장에 발목이 잡혔다.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 엄청난 수요가 있었고 고급 물품이었다는 이야기다. 세금은 구매가에 30%에 달했다.
이 위원은 “겉보기에 화려한 빛깔과 정교한 기술로 꾸며진 사치 물품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 제작하는 업체나 숙련공들은 영세한 환경에서 턱없이 적은 임금을 받고 작업했다. 이런 세금 때문에 더는 산업이 성장하지 못했고, 1989년 과세 대상에서 풀려났을 때는 하향 곡선에 들어섰다”고 했다.
■특소세로 성장 발목…저가품 탓에 애물단지 전락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유행이 전국에 퍼져 나가자 제대로 된 나전칠기로는 이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옻칠 대신 캐슈나 속칭 니스라고 불리는 바니시나 폴리에스테르 수지 칠을 한 저가품이 범람했다. ‘나전칠기는 고가품’이라는 인식이 옅어지고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또 아파트로 주거 공간이 바뀌면서 붙박이장이나 원목을 선호하는 등 미적 감각이 바뀐 것도 한 원인이다. 수공으로 제작하다 보니 치수도 제각각이었다. 이 위원은 “아홉자 장롱을 샀는데 실제 방에 들여놓고 보니 여덟자 반밖에 안 되는가 하면, 치수가 너무 커서 장롱이 들어가지 못해 창문이나 천장을 뜯어서 넣는 황당한 경우도 생겼다. 심지어 어느 가정에서는 장롱을 세워놓지 못하고 눕혀서 사용하는 경우까지 생겼다”고 설명했다.
IMF 이후 숙련공들이 떠나면서 1990년대 후반 좌천동 내 칠기가구점은 26개로 줄었다. 가끔 들어오는 주문도 품질과 단가는 물론 납기 기한을 못 맞추게 됐다. 이 때문에 나전칠기를 원하는 이들은 타지역 명인들이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을 사거나 이들에게 주문 제작했다. 그는 “이곳은 부산 공예 산업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재조명 작업이 필요하다. 장인인 절삭공 이일환 선생, 섭패공 이덕수 선생, 나전장 강정원 선생 등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고 이분들 덕에 책을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권용휘 기자 real@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