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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79> 철학자 김동규·건축가 홍순연 ‘걷다가 근대를 생각하다’

벽돌 한 장에도 시대의 흔적이 … 발로 더듬는 부산 역사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4-05 19:35:39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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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
- 도시 산책 이야기 책으로 출간

- 부산생활문화센터 한성1918
- 건물 모서리 ‘가각전제’ 처리
- 1960년대 대표적 양식으로
- 통합·증축 등 100년 역사 간직

- 집과 건물엔 흔적 그대로 남아
- “도시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 상흔을 회상하고 치유하는 작업”

눈 감고 걸어도 훤한 길이 있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넓은 골목길, 좁다란 샛길, 오래된 작은 아파트의 1층에 자리 잡은 채소가게의 반듯하지 못한 계단 3개…. 그 길의 표정에 조금만 변화가 생겨도 금방 눈치를 챈다.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보내는 과일가게 아저씨와 떡볶이 아주머니의 웃음, 한결같은 풍경은 마음이 편하다. 빨리 달리면 보이지 않는다. 걸을 때, 걷다가 두리번거릴 때, 비로소 보인다. 길 위에 사람과 건물이 있고, 그들의 시간이 있다.
‘걷다가 근대를 생각하다’의 저자 김동규(왼쪽), 홍순연 씨가 부산 중구 한성1918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산의 거리. 시민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무심히 거리를 걷는다. 길을 걷다 한 번쯤은 생각해보자. 우리가 사는 부산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이 ‘지역’ ‘근대’ ‘상처’를 키워드로 하여 도시를 산책했다. 철학자 김동규와 건축가 홍순연이 부산의 근대건축물과 장소를 답사하면서 도시의 상처를 돌아보았다. ‘걷다가 근대를 생각하다’를 낸 두 저자를 함께 만났다.

■벽돌 크기 재고, 지역 변화 기억하는 시민

걷다가 근대를 생각하다- 김동규 홍순연·소요-You·2020
‘부산생활문화센터-한성1918’ 앞에서 두 저자를 만났다. 김동규는 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의 원장이자 연구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홍순연은 삼진이음에서 건축가로 일하며 도시재생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두 저자가 함께 책을 내는 공동작업은 철학자와 건축가의 조합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들은 “건축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다. 건물 저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람이 있기에 인문학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성1918 건물의 주변을 돌면서 건물의 지난 역사를 들었다. 부산시 중구 백산길 13이라는 주소보다 백산기념관 바로 옆이라는 설명이 시민에게는 더 편하다. 필자에게도 자주 지나던 길목이고, 붉은색 벽돌이 인상적이라 기억하고 있던 건물이다.

이 건물의 역사는 한성1918이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1918년에 시작됐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상인과 대금업자들이 우리나라로 진출했다. 은행도 들어왔다.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은행은 조선은행과 한성은행뿐이었다. 한성은행이 부산에 지점을 설치한 것이 1918년이다. 당시 벽돌조와 목조, 박공형 지분을 한 본건물과 부속건물로 세워졌다. 1960년에 한 건물로 통합되고, 증축해 청자빌딩으로 불렸다. 2000년대 들어 철거 위기에 있던 것을 부산시가 사들인 이후, 구조보강 등 리모델링 과정을 거쳐 2018년 4월 한성1918-부산생활문화센터로 새롭게 탄생했다. 금융도시의 부산을 알리는 근대건축물의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이제는 생활문화의 거점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 건물에는 시대마다 다른 건축 양식들이 겹쳐져 있어요. 나락한알 회원들과 함께 건물 답사를 할 때, 재미난 일이 있었어요. 이 건물에서 모서리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가각전제(街角剪除)’를 볼 수 있어요. 우리나라의 1960년대 건축법에 따른 대표적인 양식이죠. 그 설명을 했더니, 저마다 주변 건물을 살피더라고요. 저 건물에도 흔적이 있다, 내가 아는 어떤 건물도 그렇더라 하는 현장 제보(?)도 쏟아지고요. 벽돌의 크기가 시대마다 다르다는 설명을 했더니, 벽돌 크기를 직접 재보느라 다들 분주했지요.”

우암동, 가덕도, 수정동, 낙동강변 등 부산의 여러 곳을 걸어 다니며 답사를 하는 과정은 재미있고 의미 있었다. “부산에 오래 살았지만 모르는 게 너무 많다면서도 아는 이야기를 모두 쏟아냈어요. 답사한 지역의 어르신 중에는 해당 지역에 관한 자료를 모아 스크랩까지 해서 간직한 분들도 있고요. 옛이야기를 듣는 역사 기행이 되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도시의 곳곳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

건축가 홍순연은 부산의 길에서 근대건축물을 만나는 동안 자신이 사는 지역의 변화를 훤히 꿰고 있는 ‘강호의 고수’들을 만났다고 했다. 철학자 김동규는 그 어떤 철학자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생생한 삶의 철학을 들었다고 했다. 부산을 더 알고 싶어서 함께 길을 걷고, 건물을 보고, 지난 역사의 흔적을 찾아내는 의미를 두 저자가 현장에서 만난 시민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다.

도시에는 도시민의 삶과 생활, 역사와 도시행정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부산의 산복도로를 이 책의 서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부산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산복도로는 갖가지 상처가 얽히고설킨 증거, 층층 모순의 표현이자 폭발이다. 산복도로 일대는 일제강점기 원도심의 원심력이 튕겨낸 추방지로, 해방 시기에는 귀향의 구심력이 작동하던 곳으로, 남북 전쟁 시기에는 전쟁 폭력이 미치지 않던 피란처였다. 또 전쟁 후에는 발전의 기대를 안고 오던 이들을 끌어당기던 개발 블랙홀의 중심 지대이자, 발전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간주된 잉여 인구를 강제로 도시 외곽으로 튕겨내던 추방의 중심지였다.”

그 대목을 읽으며 버스를 타고 지나면서 보았던 산복도로 동네가 생각났다. 산복도로가 가로지른 아랫동네에는 도시를 향해 뻗어 내려간 골목들이 있고, 윗동네에는 높은 산을 향해 올라가는 계단들이 있다. 그 사이에 집이 있고 더 좁은 골목들이 있다. 원해서 새긴 것이든, 원하지 않는데 새겨진 것이든, 도시에는 많은 흔적이 있다. 사람이 살면서 만들어온 역사가 그 길, 집과 건물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많은 근대건축물이 사라졌어요. 이 책을 쓰는 동안에도 사라졌지요. 2005년에 처음으로 부산에 남아있던 근대건축물을 조사한 이후 300여 개가 사라졌습니다.” 개발, 도시 행정 등 사라진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오래된 건 무조건 허물고 새로 세우자는 식의 발상은 아니었기를 바래본다. 두 사람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지우고 덮어쓴 상흔을 더듬어 가는 회상의 작업이자 치유와 성찰의 작업”이라고 말했다.

책에 소개된 길을 걷고 싶었다. 빨리 달려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보면서 자세히 봐야겠다. 모서리를 깎은 가각전제의 건물이라면 1960년에 세워진 건물이란다. 문득 벽돌 크기가 재고 싶어질지도 모르니 줄자도 하나 챙겨야 할 것 같다.

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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