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한 것엔 연민, 자연엔 경외심
- “시 말고는 죄다 어리버리한 사람”
- 모국어 ‘결’ 해칠까 처음엔 주저
- 부부 번역가와 의견 주고받으며
- 시 본래 의미 살리려 2년간 작업
- 신작 20편 한글·영어 동시 수록
문학은 국경과 시공을 초월하는 감동을 전한다. 우리는 한국어로 번역된 외국 문학을 읽고, 한국문학이 외국에서 출간될 때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한국문학이 번역될 때 우리말의 섬세한 결이 제대로 옮겨질까. 특히 시를 읽을 때는 순우리말, 의성어, 의태어 등을 읽는 맛이 있는데 그것까지 전달될까. 그런 생각은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 어떤 언어로 표기되었든 시를 읽는 독자는 저마다의 감동을 느낄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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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일근 시인이 단골이자 쉼터 같은 북카페에서 시집 ‘저녁의 고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정일근 시인이 한영 대역 시집 ‘저녁의 고래’를 냈다. 한국 시의 정수를 뽑아 영어로 번역해 한영 병기한 후 국내외 시장에 보급하는 아시아출판사의 ‘K-포엣’ 시리즈 일곱 번째 시집이다. 기획 단계부터 번역 작업에 들어간 한영 대역 신작 시집으로는 처음이다. 정 시인의 신작 시 20편이 실려 있다. ‘저녁의 고래’를 비롯해 ‘K-포엣’ 시리즈 시집들은 현재 아마존을 통해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판매되고 있다. 정 시인을 경남 창원시 의창구 봉곡동의 북카페 ‘오누이북앤샵’에서 만났다.
■시 말고는 죄다 어리버리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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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의 고래- 정일근·아시아·2019 |
정 시인은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한 이후 약한 것들을 향한 동병상련과 연민을 담은 서정을 노래해 왔다.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방!’ 등 12권의 시집을 냈고, 지난 8월에 ‘저녁의 고래’를 보탰다.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학상을 두루 수상했다. 현재 경남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북카페는 작은 규모였지만 길 쪽으로 창을 크게 내어 바깥이 훤히 내다보였다. 벽에 시집 ‘저녁의 고래’가 그림액자처럼 진열돼 있다.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보는데, 저만치 정 시인이 걸어온다. 이쪽저쪽 고루 시선을 던지며 천천히 걸어왔다. 사진 촬영이 있다고 했건만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영락없이 동네 주민이다. “이 카페에선 그냥 동네 아저씨죠. 커피도 마시고, 책도 보고, 사람도 만나고…. 여긴 제 쉼터입니다. 맞은편에 학교가 보이죠? 학생들이 하교할 무렵 여기 앉아서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그의 시 ‘바다가 보이는 교실’ ‘어머니의 그륵’ 등이 수록돼 있다. 그의 시를 교과서에서 먼저 만난 학생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면서 미소 짓는 시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모르겠다. 정 시인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와 동시도 쓰고 있다.
“이번 시집까지 열세 권의 시집을 냈는데, 모두 다른 출판사에서 냈다”는 시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지난 시집들을 낸 출판사 이름들을 더듬어보다가, 원하는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기 위해 출판사 사정에 맞추어 시집 발간을 기다리기도 한다는 데 정 시인은 왜 그러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시집을 내야 할 때 바로 내고 싶어서요. 그때마다 인연이 닿는 출판사에서 냈어요.” 정 시인을 시집출판계의 노마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자연의 이름을 불러서 살아있게 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말했다. “하나의 말이 태어나서 사라지지 않도록,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인터뷰 도중 시인은 길 건넛집 옥상을 보았다. 시인의 시선 끝에 활짝 피어난 꽃 화분이 있었다. 그는 올해 딴 꿀을 먹으면서도 “올해는 꽃이 잘 피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자연에서 오는 것에 대한 경외심, 고마움을 느낍니다. 예사로 볼 수 없지요. 시인은 사람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늘 긴장, 감사, 감시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얼마 전 한 시인이 정 시인에게 이런 말을 했단다. “시에 대한 기능만 남아 있는 사람. 시 말고는 죄다 어리버리한 사람”이라고. 시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그것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구절은, 이 시어는 어떻게 번역됐을까
‘저녁의 고래’는 기획 단계부터 출판까지 2년의 시간이 걸렸다. 번역은 대구에 거주하고 있는 부부 번역가 지영실과 다니엘 토드 파커가 맡았다. 두 사람은 계명대학교 영문과 조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영어로 번역해 출판한 시집으로는 나희덕의 ‘야생사과’, 심보선의 ‘눈앞에 없는 사람’, 허수경의 (한영 대역판) ‘허수경 시선’,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이 있다. 시의 본래 의미와 맛을 살리기 위해 2년간 시인과 번역가 부부는 메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왼쪽에는 한글시가, 오른편에는 번역된 영어시가 놓인 시집은 그렇게 태어났다. 시력 36년 차에 나온 열세 번째 시집이다.
모국어로만 시를 쓰다가 영한 대역 시집을 내는 시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시인노트’에서 엿볼 수 있다. “내 무지겠지만, 나는 내 시가 과연 영역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다. 내가 사용하는 시어가 모국어인데, 그 모국어가 영역이 된다면 모국어가 주는 순연한 감동을 그대로 전달해 줄까? 그런 부질없는 걱정으로 외국어로 번역되는 일을 저어했다. 그 사이 21세기 문학은 세계로 달려갔고, 나는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처럼 폼만 잡고 고민만 하고 있었다.”
시인만 걱정했을까. 독자도 모국어의 순연한 감동이 제대로 전해질지 걱정이다. 영어라면 통 자신이 없는 필자는 처음에는 번역시를 읽지 않았다. 한글시를 몇 번씩 읽으며 감동을 흠뻑 느낀 다음에야 영어시를 보았다. 도대체 이 구절은, 이 시어는 어떻게 번역됐을까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시맛’이라는 시를 읽을 때 그 호기심이 폭발했다. “고향 진해 앞바다에서 잡은 싱싱한 전갱이 한 마리, 깊고 어둡고 고독한 장독 밑바닥에서 또르르르 어머니의 맛간장 한 방울 되는데 꼬박 두 해 스물 네 달, (하략).” ‘또르르르’는 이렇게 옮겨졌다. ‘drrdrrdrrdrr’. 의태어임을 표현하고자 오른쪽으로 기운 글자체로 시집에 앉았다. ‘또르르르, drrdrrdrrdrr’, 연이어 발음해본다. 어느 먼 나라의 영어사용자가 이 시를 읽으면서 필자처럼 두 개의 언어로 발음해보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drrdrrdrrdrr, 또르르르’.
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