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도조약 협상 과정서 일본이 초청
- 김기수 포함 76명 사절단으로 파견
- 부산항서 근대선박 타고 요코하마로
- 조선소·공장 등 방문 … 고종도 관심
- 金, 신문물 작동 원리 등 꼼꼼히 기록
- 귀국 이듬해 견문기 ‘일동기유’ 펴내
- 당시 시대상 근대화 필요성 못 느껴
필자는 1993년부터 일본 요코하마에서 6년 정도 생활하면서 자주 생각하곤 했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언어의 장벽에 관한 것이었다. 만약 한국이 지금 미국이나 옛날의 영국처럼 세계 최대 강대국이라면, 수많은 외국인이 한국어를 사용하게 될 것이고, ‘그럼 굳이 일본에 와서도 일본어를 배우려고 애쓰지 않고 한국어를 쓰면서 스트레스 안 받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 왜 한국은 근대화가 늦어졌던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서양의 근대 문명이 조선에 유입되던 개항 시기 일본에 첫 번째 수신사(修信使)로 파견된 김기수(金綺秀)의 견문 활동을 통해 수신사가 무엇을 보고 느꼈을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 체결 협상 과정에서 일본의 요청으로 조선은 그해 5월 22일 김기수를 정사로 한 76명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대마도 등지를 거치며 문물을 전해주던 통신사와는 달리, 문물을 받는 입장이던 수신사는 부산항에서 일본의 증기선 황룡호(黃龍號·고류마루)를 타고 대마도에 들르지 않고 바로 시모노세키로 가서 1박 하고, 고베를 거쳐 29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요코하마에서 기차를 타고 도쿄 신바시역까지 간 조선사절단 일행은 가마대의 호위를 받으며 숙소인 엔료칸(遠遼館)에 도착했다. 증기선과 기차라는 근대적 교통기관을 이용해 출발한 지 일주일 만에 도쿄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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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수를 정사로 한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도착한 모습을 그린 그림. 당시 영국 신문에 실린 삽화라고 한다 |
■김기수의 ‘일동기유’
조선의 고종은 ‘문명개화’를 표방한 일본에 관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고종은 김기수의 제1차 수신사가 세밀한 관찰을 해서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 측은 조선의 사절단을 후하게 대접했고, 두 나라가 제휴할 필요성을 분명하게 조선 측에 드러내며 그들이 거둔 개화의 성과를 내보였다. 이는 전통적으로 유대 관계가 깊은 청나라보다 일본과 관계를 긴밀하게 맺으라는 강한 메시지였다.
제1차 수신사의 방문지는 일본 외무성, 아카사카 임시 황궁, 엔료칸, 박물관, 히비야 훈련장, 해군사관 기숙사, 육군포병 본창, 공학 기숙사, 개성학교, 여자사범학교, 도서관(유시마 성당), 원로원 의사당 등이었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수신사 일행은 조선소와 천연두 의료시설인 종두관도 방문해 구경했다.
김기수가 쓴 ‘일동기유(日東記遊)’는 수신사의 사행 기록이다. ‘일동기유’는 2018년 같은 제목의 한글 번역본(구지현 옮김·보고사) 등으로 출간됐다. 김기수는 사절단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 해인 1877년 황해도 상산 부사로 있을 때 이 책을 정리했다. 모두 4권으로 이뤄졌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제도와 기계의 편리성 등 다방면에 걸쳐 기록하고 있다.
김기수는 일본으로 출발할 때 처음으로 타본 증기선 황룡호에 놀랐다고 했다. 1868년에 진수한 황룡호는 총톤수 617t의 배였다. 근대식 선박을 처음 접한 김기수가 황룡호의 크기와 모습에 압도된 것은 당연하다. 김기수는 처음 접하는 근대식 기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운항 및 유지하기 위한 방안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을 듣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당시 근대화된 나라가 아니었던 나라, 조선의 지식인이던 그는 근대식 선박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였던 것 같다.
■왜 더 적극적이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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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수신사의 정사로서 1876년 일본을 둘러본 김기수(1832~미상)의 사진. |
또한, 김기수는 요코하마에서 화륜차(기차)를 눈앞에 두고도 기차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정도로 기차의 형상에 대해 전혀 알지를 못했다. 그 전에 기차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관차, 객실의 구조와 장식 그리고 철로 등에 대해 살펴보고 기록했다. 하지만 그 기록은 일본의 사절단 일행인 타마무시 사다유우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증기기관차를 보고 차량 장비와 용도, 형상 및 작동원리 등을 과학적으로 상세하게 기술한 ‘항미일록(航米日錄)’의 기록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김기수는 일본 공부성(工部省)에서 전신기가 작동하는 것을 보고 또한 놀랐다. 공부성은 메이지 초기 정부의 관영사업을 통괄하고 일본 산업의 근대화를 추진한 관청이다. 일본에 전신기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서였다. 미국의 ‘흑선’을 몰고 와 요코하마에 상륙한 페리는 막부가 외교사절을 맞이하기 위해 설치한 응접실과 벤텐사(弁天寺) 경내에 있던 저택 사이 약 1마일 거리에 전선을 가설하고 시험통신을 실시했다.
김기수는 전신기의 구성, 기기 배치, 작동 원리 등에 대해서 나름대로 상세하게 기술했다. 다만, 아쉽게도 이런 근대문물이 어떤 역할을 하며 왜 전신기가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런 기술을 조선에 도입하여 활용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배울 기회가 오면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김기수는 수신사로서 처음 근대 문물을 접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어떤 연유에서든 일본인이 소개하고 배워가기를 권유했음에도 그런 서양문물이 조선 근대화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미처 내다보지 못했는데 조선 근대화를 앞당길 기회를 놓쳤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 비춰 보고 미래 대비해야
일본 측에서는 요코스카에 있는 조선소를 견학하도록 일정을 짰으나 김기수는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태도도 보였다. 일본의 미국 사절단(万延元年遣米使節團)은 미국의 조선소를 빠짐없이 방문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요코스카의 조선소를 건설했다. 그 이후 요코스카 조선소는 주요한 조선소로 성장했다.
김기수는 일본의 근대식 학교도 방문했다. 유학자인 그는 일본의 교육이 공리(功利)의 학문에 지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일본은 에도시대부터 상품 경제가 발달하면서 경제 활동에 필요한 실용적 지식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일상과 경제 활동을 하는 데 읽고 쓰고 셈하는 실용적 지식의 필요성이 점차 확대됐다. 그 당시 김기수는 이런 실용적인 학문이 근대의 바탕이 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는 결국, 조선의 근대화에 방해 요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수신사는 임무 수행 과정에 일본의 다양한 근대 문화를 견학하고 또 도입하도록 일본 측의 권유를 받았다. 그 당시 일본은 조선을 일본 쪽으로 끌어들여 청나라나 러시아 세력에 대응하겠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국제 질서의 흐름을 폭넓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응을 할지 고민할 계기를 수신사의 업무를 통해 더 빨리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한국은 근대화에 뒤처져 많은 피해와 큰 아픔을 겪은 경험이 있다. 국제 질서가 급변하고 세계적 경쟁이 치열해지는 요즘, 과거를 돌아보고 내일을 열어갈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공미희 부경대 HK 연구 교수
※ 공동기획:부경대 HK+ 사업단,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