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절·제사 때면 모이던 할매들
- 그들 수다엔 해학·애잔함 담겨
- 훌륭한 스토리텔러이자 도서관
- 한 마을이 쇠락해가는 것처럼
- 삶의 주인공들도 스러져갔지만
- 일상은 소설로 계속 이어진다
도시의 아파트에서는 현관문만 닫고 들어가면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기 쉽다. 언제부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리 메말라버렸나 한편으로는 걱정스럽다. 그럴 때면 고향의 시골 마을이 떠오른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렇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기만 해도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지던 그곳.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많은 마을을 잃었다. 노인만 남아 서서히 저물어가는 마을이 있을 뿐이다. 송은일 소설가의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은 그런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광주에서 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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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은일 소설가가 화분이 가득한 작업실 옥상에서 자신의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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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이 가득한 아늑한 작업실
송 작가는 광주 북구 오치동에 작업실을 두고 글을 쓴다. 오치동의 한 골목에서 이층집으로 오르는 계단부터 옥상까지 화분이 가득한 예쁜 집을 보았다. 그 집에서 송 작가가 나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의 작은 고향이 이곳에도 있다. 양옥집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 칸 한 칸에 화분이 놓여있다.
송 작가는 196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1학년 말에 서울로 전학을 갔다. “오빠와 동생을 챙기고 밥도 하면서 학교에 다녔죠.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할 때까지 서울에서 살았어요. 남편이 광주로 전근 와서 지금까지 30년째 살고 있어요.”
199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꿈꾸는 실낙원’, 200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에 ‘아스피린 두 알’이 당선됐다. 소설을 쓰는 것 외에 다른 삶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그의 말은 작품을 보면 실감이 난다. 장편소설 ‘불꽃섬’ ‘한 꽃살문에 관한 전설’ ‘소울 메이트’ ‘도둑의 누이’ ‘사랑을 묻다’ ‘왕인(전 3권)’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매구 할매’ ‘반야(전 10권)’ ‘달의 습격’, 소설집 ‘딸꾹질’ ‘남녀 실종지사’ ‘나의 빈틈을 통과하는 것들’ 등이 있다. 장편소설 제목을 말하는 것만으로 송 작가의 이야기가 가슴 속으로 밀려드는 기분이다.
작업실은 가정집의 구조를 그대로 살려둔 형태라 아늑했다. 글을 쓰는 방에는 ‘은일재’라고 새긴 소박한 현판이 붙었다. 송 작가가 글을 새겼다. 컴퓨터가 놓인 큰 책상이 있고, 창으로 햇빛과 바람이 부드럽게 밀려 들어왔다. 벽에는 ‘반야’의 주 무대인 마을을 직접 그린 그림이 붙어있다. 지도이기도 하고 그림이기도 하다.
■고향 할매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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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 송은일·문이당·2019 |
올해 5월에 발표한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은 2013년에 출간된 송 작가의 전작 ‘매구 할매’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반가운 소설이다. ‘매구 할매’는 고흥 금당마을의 400년 된 계성재를 중심으로 그 가족과 수많은 식솔의 삶과 애환을 그리고 있다.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은 ‘매구 할매’ 외전으로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16편의 연작소설이다.
‘아나, 복돈이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금당 마을 안 곳곳마다 불리는 이름이 있다. 큰뜸, 안뜸, 작은뜸, 잿등, 뒷재, 국새, 사장, 새토구, 안산울, 솔각지 등은 마을 안 지명들이다. 마을을 감싸며 퍼져 있는 외곽의 땅에는 동정지, 스무실, 안소재, 도투메기, 제비나리, 오종굴, 갯가, 서당골, 붉은데기 등등의 이름이 붙어있다. 그 이름들의 유래를 제대로 다 아는 사람은 없다. 그저 옛날부터 불려온 대로 무심히 부를 뿐이다.” 지명들을 되뇌어보면 머릿속으로 금당 마을이 그려진다고 했더니, 송 작가는 아예 종이 위에 마을을 그리며 설명해 주었다.
“어린 시절 명절이나 제사가 되면 집에 할매들이 많이 왔어요. 말 그대로 할매들이 바글바글, 그분들이 수다 떠는 소리는 왁자했지요. 어릴 때는 그 소리가 시끄럽다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고, 글을 쓰면서 비로소 이야기가 들려왔어요. 여러 어르신이 세상을 떠나서 이제는 몇 분 안 계셔요. 그분들 모두 훌륭한 스토리텔러이시죠. 사전에서도 못 본 말들,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비유, 해학과 애잔함이 녹아 있는 이야기들이 줄줄 이어지는 겁니다. 노인 한 분이 세상을 떠나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다더니, 나이 들어보니 그 말이 진짜더라구요.”
소설에는 그분들의 이야기가 생생한 말로 살아 있다. 송 작가의 소설 읽는 재미 중 하나가 생생한 말,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송 작가는 틈만 나면 국어사전을 본다. 그의 국어사전에는 여기저기 밑줄도 그어져 있다. ‘매구’에도 밑줄이 있다. 1000년쯤 산 여우가 변해서 된다는 신비한 동물이 매구이다.
소설에는 매구 할매와, 고향을 지키며 살다가 외롭게 죽는 할매들이 있다. 한때 은성했던 마을이 쇠락해 가는 것처럼, 구구절절 사연이 많았던 삶의 주인공도 한 명씩 스러져간다. 이 땅의 모든 부모님의 슬픈 이야기를 보는 기분이 든다. 소설 마지막은 매구 할매의 임종 소식을 전하는 마을 이장의 안내방송이다. “이장입니다. 오늘, 그러니까 조금 전, 그러니까 5분 전쯤에 고운 도깨비하고 천 년 여우가 손을 잡고요. 음, 소천하셨답니다. 긍게 음, 이건 부고입니다. 매구 할머님이, 음…….” 매구 할매가 세상을 떠났다. 한 세상이 이렇게 저물었다. 하지만, 송 작가의 소설은 계속 이어진다. 아직도 써야 할 이야기가 많다. 그는 광주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의 일상, 그 이야기를 한 편씩 쓰는 중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작업실 옥상을 한 번 더 올려다봤다. 옥상에는 대나무를 심은 큰 화분이 있다. “하동 평사리 박경리문학관에서 대나무 뿌리를 얻어와 심었는데 3년 만에 싹이 올라왔어요. 잘 자라고 있답니다” 송 작가의 비밀화원에서 자라는 대나무는 언제쯤 꽃을 피울까. 백 년쯤 걸릴까. 대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지금부터 기다릴 참이다.
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