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광대 배워 시작했다는 들놀음
- 수영야류·동래야류 등으로 계승
- 제의·대동놀이 연결하며 발전
- 풍자·개방성 담은 ‘생활예술’로
‘부산 춤의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바다와 연관한 해양성, 개방성과 그에 따른 부산 사람의 기질과 연관한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여전히 ‘부산 춤의 정신’을 찾는 시도는 진행 중이다. 필자는 ‘부산 춤의 정신’을 부산의 대표적인 탈놀이인 ‘들놀음(야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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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 녹아든 열린 춤’의 특징을 잘 간직한 수영야류(국가무형문화재 제43호). 국제신문 DB |
부산에는 수영야류(국가무형문화재 제43호)와 동래야류(국가무형문화재 제18호) 두 종류의 탈놀이가 남아 있다. ‘야류(野遊)’는 ‘들놀음’ ‘들놀이’의 한자 표기다. 야류의 유래는 민속학자 송석하가 ‘오광대 소고’(1933)에서 처음 언급했다. 경남 합천군 초계 밤마리에 있던 수영 사람이 오광대를 배워 시작했다는 설(송석하)과 밤마리 대광대패를 초청해 노는 것을 따라서 놀았다는 설(1970년대 등장한 설)이 있다. 둘 다 오광대를 배워서 시작했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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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진이 들놀음을 활용해 안무한 ‘사자-who’. 사진가 박병민 제공 |
1980년대에 농경의례설이 나온다. 오광대는 전문 광대패의 상업적 연행이고, 탈놀음이 여러 꼭지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수영야류는 마을 고사, 길놀이 등 제의와 대동놀이가 포함된 것으로 놀이의 구조와 형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명칭도 낙동강을 두고 ‘야류(동편)’와 ‘오광대(서편)’로 다르다. 오광대를 배워서 시작한 것이라면 명칭을 굳이 다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들놀음’의 ‘들’은 야외 공연 장소만이 아니라 농사짓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풍년과 마을 공동체의 무탈을 기원하는 농경의례가 바탕이다. 농경의례설에 따르면 오광대를 접하기 전부터 마을 공동체의 놀이가 있었고 이후 전문 예인 집단인 오광대의 영향으로 놀이가 정교해졌다고 한다.
‘야류’와 ‘오광대’의 유래와 구조가 다르다는 점에서 부산 춤 정신의 실마리 몇 개를 찾을 수 있다. 먼저 ‘삶에 녹아든 춤’이다. 오광대가 전문 예인 집단의 상업적 목적의 연행이라면 들놀음은 생활문화다. 들놀음이 지역민의 삶에 얼마만큼 가까이 있는지는 수영야류의 ‘시박(試瓠)’을 통해 알 수 있다. ‘시박’은 정월 14일 밤 고을 어른들 앞에서 연희자들이 기량을 선보이고 배역을 확정받는 절차이다. 농사를 짓고 생업을 유지하면서 틈틈이 닦은 기량은 공개적으로 수준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전문예인 집단이라면 이런 절차가 필요하지 않다.
다음은 농사 장소인 동시에 광장이고 놀이판인 ‘들’의 개방성과 가변성이다. ‘열린 춤’이라 고쳐 말할 수 있는데, ‘열린 춤’이라는 것은 춤 때문에 때와 장소의 성격이 규정되고, 춤의 시작과 끝부분에 마을 고사와 길놀이 같은 제의와 공동체를 환기하는 대동놀이가 연결된 열린 구조를 가지며 내용으로는 사회 모순을 풍자로 품는 넉넉함을 말한다.
인근 진주에는 ‘솟대쟁이 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울산지역은 현재 전승되지 않지만 ‘죽광대 놀이’가 있었다. 솟대쟁이 놀이와 죽광대 놀이가 전문 예인 집단의 연희라면 부산의 들놀음은 생활예술로 삶에 뿌리박은 열린 춤이다. 이런 부산 춤의 정신이 창작 춤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지난해 이용진이 안무한 ‘사자- who’에는 탈놀이의 풍자성이 잘 담겼다. 시각을 넓혀 보면 최근 세계적 추세로 번지는 ‘이머시브 공연’(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고 관객이 공연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거나 참여하는 공연 형식)은 들놀음의 ‘열린 춤’ 개념과 많이 닮았다.
하지만 지금 전승되는 들놀음은 어떤가. 고유의 정신이 희석되고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소수화, 고립화, 전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존과 전승은 박물화나 자기 환원이 아니라 다시 거리로 들로 관객의 가슴으로 뛰어들어야 가능하다. 그래야 ‘삶에 녹아든 춤’ ‘열린 춤’이라는 들놀음의 정신이 ‘개방성’ ‘포용성’ ‘다양성’ 같은 추상성을 털어내고 지금 여기 부산의 춤 정신이 될 수 있다.
춤 비평가·문화기획 이상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