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쓰
- 귀족·영주들 매사냥 금지시켜
- 쇼군가문이 독점, 권위 상징돼
- “매 보내달라” 막부 간절한 요청
- 조선, 12차례 통신사 방문 통해
- ‘해동청’ 400여 마리 선물하기도
- 무사들에게 인기 높던 조선 매
- 주요 각료에게만 한정해 하사
- 상대적으로 낮은 격의 신하엔
- 매를 그린 그림 내려 신임 표시
임진왜란 이후 일본 천하의 패권을 장악한 에도막부 제1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 1542-1616)는 더할 나위 없이 매사냥을 좋아하였던 것 같다. 그의 생애 1000회가 넘는 매사냥을 하였다고 하니 말이다.
에도막부 시대 공식 역사서인 ‘도쿠가와 짓키(德川實紀)’에 쓰인 이에야쓰 관련 기록(‘도쇼구 고짓키 東照宮御實紀’)에서 매사냥의 목적을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교외로 나가 백성의 정세를 시찰하는 한편, 신체 단련, 군사훈련, 가신단의 영내 지배 실태 조사 등을 겸하며, 지방 지배를 위한 거점 만들기의 일환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야쓰가 은퇴 이후 머물렀던 시즈오카현 슌푸성(駿府城)에 있는 이에야쓰 동상의 한쪽 팔에 매가 앉아 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매 사랑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의 매를 간절히 원한 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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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시즈오카현 슌푸성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동상. 어깨에 매가 앉아 있다. |
이에야쓰는 중세 말 일본 전국시대의 수많은 전쟁을 거쳐 천하를 통일하여 새로 에도막부를 개창하게 되자, 교토 귀족 및 다이묘(大名)를 비롯한 영주들의 매사냥을 금지하고, 나아가 매사냥에 쓰일 매의 일반 매매를 일절 금지했다. 매사냥을 일부 한정된 사람에게만 허락하는 등 매는 쇼군 가문 도쿠가와의 독점이 되고, 이른바 쇼군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에도시대 최고 권력자인 쇼군들은 대대로 매사냥을 좋아했는데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1604-1651) 역시 할아버지 이에야쓰를 닮아 매사냥을 아주 좋아해 쇼군 재직 중 수백 회가 넘는 매사냥을 했으며 에도 성 안에 매를 사육하는 응방(鷹坊)을 설치하는 등 매사냥 관련 일화를 매우 많이 남겼다.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 1684-1751)도 매사냥에 깊은 관심을 보여 매와 관련된 고금의 서적을 수집·연구하여 스스로 책을 낼 정도였다고 한다.
에도시대 매사냥에 쓰인 매는 어디서 공급됐을까? 일본 동북부 오우(奧羽)의 여러 번(藩)이나 홋카이도 남쪽 마쓰마에(松前)번 나아가 조선의 매가 주류를 이뤘는데, 특히 조선 매는 매우 높이 평가받았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조선의 외교서 ‘변례집요(邊例集要)’ 계축(1613년) 9월 조에 나오는 “관백 미나모토 이에야쓰가 조선의 매와 말을 요청함이 심히 간절하였다(源家康, 遼東鷹馬, 求之甚切)”(권 12, 한국사료총서 제16, 탐구당, 1971년)라는 기록에서 에도막부 제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조선 매에 대한 간절한 요구를 살펴볼 수 있다.
■통신사, 매번 10~55마리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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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북경고궁출판사에서 펴낸 ‘청궁조보(淸宮鳥譜)’에 실린 해동청. 중국의 그림이지만, 일본 에도시대에 큰 인기를 누린 조선 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박화진 제공 |
이러한 우수한 조선의 매는 에도막부 쇼군 권력의 구축·유지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는데, 에도막부를 비롯한 다이묘의 무사 사회에 조선의 매가 도입된 계기가 바로 조선통신사이다. 즉 쓰시마번(對馬藩)은 에도막부 제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간절한 뜻을 받아들여 조선통신사를 통해 적극적으로 조선 매를 유입하였으니, 조선 후기 12차례의 조선통신사행을 통해 에도막부 쇼군에게 보낸 조선 매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제1차(1607년) 해동청(蒼鷹) 50마리, 제2차(1617년) 50마리, 제3차(1624년) 50마리, 제4차(1636년) 20마리, 제5차(1643년) 30마리, 제6차(1655년) 55마리, 제7차(1682년) 25마리, 제8차(1711년) 25마리, 제9차(1719년) 44마리, 제10차(1748년) 30마리, 제11차(1763년) 20마리, 제12차(1811년) 10마리 등으로 후기로 접어들면서 점점 줄어들기는 하지만 적지 않은 숫자의 매가 일본으로 보내져 당시 일본 지배층이던 무사들에게서 크게 주목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통신사 화가들이 그린 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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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 출신 화가 운암이 그린 ‘응도’. |
조선통신사와 함께 일본에 도착한 조선 매는 쓰시마에서 일단 오사카로 운반돼 그곳에서 막부 전속 매부리(鷹匠,응장)에게 양도되어 막부 관리 아래 들어갔다. 그렇다면 조선 매는 어떤 사람들에게 양도·수수됐던 것일까? 조선 매는 에도시대 일본 사회에서 매우 인기가 높아 많은 영주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에도막부가 조선 매를 하사할 때는 매우 엄격한 기준에 따라 막부 주요 각료, 특히 가문의 격(家格)이 매우 높은 몇몇 다이묘에 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쇼군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 할 수 있는, 당시 가문의 격이 가장 높았던 도쿠가와 고산케(德川御三家, 에도시대 도쿠가와 성씨 중에서 도쿠가와 쇼군 가문 다음가는 지위를 가진 3개 가문을 일컬으며 단지 ‘고산케’라고 부르기도 한다)를 비롯해 도쿠가와 일족 다이묘(아이즈·다카마쓰·후쿠이) 그리고 막부 행정 고문이라 할 수 있는 이이(井伊)가문 정도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에도막부 쇼군 중에는 가문의 격이 상대적으로 낮아 매를 하사할 수 없는 다이묘 및 측근에게 간혹 매를 그린 그림을 하사하여 그 신임의 뜻을 표현하였다. 현재 조선 시대 후기 조선통신사행 당시의 조선 화가 및 동래 출신 화가들이 그린 조선 매의 그림이 적지 않게 전래하는 것은 매를 갖고 싶어도 소유할 수 없었던 에도시대의 많은 무사의 갈망과 요구를 들어주기 위한 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예를 들면 부산박물관이 소장한 조선통신사행 화가 이성린(李聖麟)·이의양(李義養)의 ‘응도(鷹圖)’(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동래 출신 화가 해옹(海翁)·운암(雲庵) 등이 그린 ‘응도’ 그리고 일본 오사카 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이수민(李壽民)·이의양·하담(荷潭) 등의 ‘응도’ 사례를 들 수 있다.
■해동청, 일본 하늘 누비다
이렇게 에도시대 일본 지배계층 무사들을 매료시킨 조선의 매는 중국에서도 해동청이라 불리며 높은 인기를 누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드디어 2010년 11월 한국 ‘매사냥’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록된 것도 전근대 조선의 우수한 매가 동북아시아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던 기나긴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조선의 매는 세계에 자랑할 우수한 우리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박화진 부경대 사학과 교수
※ 공동기획:부경대 사학과·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