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에는 별다른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정직하게 말해 이야기는 단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깔아놓기 위한 포석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의 2막 구조는 기묘하게 뒤집혀 있다. 만약 범용한 감독이라면 윤영(박해일)이 선배의 아내였던 송현(문소리)을 만나 벌이는 서울에서의 치정부터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도록 선형적으로 편집했을 것이다. 장률은 그러지 않는다. 그는 도리어 이야기의 기승전결에서 역으로 전(轉)과 결(結)을 먼저 보여주고 기(起)와 승(承)을 뒤로 돌려버린다.
통속의 치정극을 만들고자 했다면 실패이다. 그러나 의도된 실패는 작가의 영화로선 성공이 된다. 중요한 건 윤영과 송현의 관계가 아닌 풍경-이미지의 논리이다. 두 사람이 군산에 도착한 때부터 영화는 도시 곳곳에 남겨진 일본의 흔적, 사라져가는 근대의 잔재를 사진가의 정갈한 흑백 프레임 속에 쓸어 담는다. 재일교포 주인(정진영)은 적산가옥을 민박집으로 운영하면서 틈틈이 군산 풍경을 필름 카메라로 찍고, 자폐가 있는 그의 딸(박소담)은 일본식 인형을 쥔 채 적산가옥 안에서 그림자처럼 운신한다. 윤영과 송현의 군산행은 봉인된 시간의 열쇠를 찾는 탐색의 과정처럼 보인다.
군산행이 과거로의 여행이라면 서울의 에피소드는 조선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현 세태를 풍자한다. 윤영의 아버지는 조선족 가정부를 고용했으면서도 노골적인 비하 발언을 일삼고, 거리에서 차별 반대 집회를 구경하던 윤영은 그곳에서 송현과 만난다.
군산과 서울로 나뉜 두 에피소드를 잇고 영화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시인 윤동주(1917~1945)에게 있다. 군산 여행 중 일본식 건물 앞에서 윤동주를 이야기하던 송현은 조선족으로 오인당한 걸 불쾌해하는 반면, 윤영은 자신의 집 가정부가 윤동주의 후손이란 걸 알고 반기는 장면이 대조를 이룬다.
현재의 관점에선 연변 출신 조선족이라 할 수 있는 윤동주는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 반면, 정작 오늘날 조선족은 동족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율배반의 현실을 ‘군산’은 풍자적으로 꼬집는다.
나아가 장률은 지금의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를 가른 분단과 경계의 기원이 강점기로부터 기원하지 않는가 하는 역사에 대한 관점을 영화의 맥락에 넌지시 내비친다. 통속적 서사를 일종의 맥거핀으로 삼은 ‘군산’은 한국 민족주의의 비틀린 풍경을 해부하고 그 기원을 탐색해 장률 필모그래피에서 또 한 번 작가적 성취를 이루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